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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칼럼>관철동시대 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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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도전5강」은 창공을 솟구쳐 올랐으나 이내 불꽃놀이처럼 허망하게 꺼져갔고,조훈현(曺薰鉉)서봉수(徐奉洙)가 펼쳐놓은 어둠의세계는 여전히 밤하늘처럼 건재했다.바둑계는 풀이 죽었다.강한 신인들은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아마바둑계는 오랜 세월 프로쪽에 샘물을 공급하는 원천이었으나그곳도 이미 노령화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55년부터 1년에 4명씩 입단하던 제도가 76년부터 프로들의 기득권주장으로 1년에2명으로 줄었고, 이때문에 병목현상이 일어났다 .입단대회는 지옥문이 됐고 아마강자들은 때를 놓치고 늙어갔다.
80년대 아마최강으로 「호랑이」란 별명을 지녔던 김철중(金哲中)은 불운의 대명사였다.아마국수전에서만 5회우승,국가대표5회,제1회KBS바둑축제에서 우승해 승용차를 받기도 했던 김철중이었지만 입단대회에서만은 잇따라 낙방했다.접바둑에 관한한 曺.徐에 필적한다는 김철중은 90년 만35세에 이르러 비로소 관문을뚫었다.바둑나이로는 40을 환갑으로 친다.그는 입단대회라는 첫문에 가로막혀 재능을 거리에 쏟아버린 셈이었다.10수(修)는 보통이었다.그래도 해마다 11월이 되어 한국기원에 입단대회의 방문이 나붙으면 칼을 갈며 초야에 묻혀있던 아마강자들은 저마다비법을 가슴에 품고 묵묵히 대회장에 나타났다.
83년 17세의 유창혁(劉昌赫)이 세계아마선수권전 한국대표로출전하더니 결승까지 올라갔다.대국을 지켜본 일본의 오타케(大竹英雄)9단은 한눈에 「대성의 재목」이라고 평했다.
국민학교때부터 떠돌이처럼 야간열차를 타고 전국의 성인아마대회를 전전하던 유창혁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이채롭다.6학년때 국민학생으로는 최초로 마산의 학초배 전국아마대회에서 우승,이후가정환경 때문에 3년간 모습을 감추더니 중3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입단은 번번이 좌절됐다.84년 인재발굴에 고지식하기 이를데 없던 한국기원이 세계대회에서 준우승한 유창혁에게 최초의 특혜를 준다.
유창혁은 이리하여 만18세에 프로의 관문을 뚫었다.현재 한국기원의 연구생제도는 「18세」가 데드라인이다.18세까지 입단하지 못하면 장래의 희망이 없는 것으로 간주돼 연구생에서 떠나야한다.유창혁도 그때 입단하지 못했으면 김철중처럼 청춘을 허무하게 보내버렸을지도 모른다.
프로가 되어 연전연승하던 유창혁은 어느날 말했다.
『의외로 쉬운데요.입단대회는 생각만해도 끔찍한 지옥이었거든요.』 아무도 돌보지 않던 이 천재는 이렇게 구제(?)되었다.바둑4인방중 조훈현.이창호는 어릴 때부터 고수들에 둘러싸여 엘리트수업을 받았다.서봉수.유창혁은 잡초처럼 자라다가 기적적으로 18세에 프로가 됐다.이들은 지각생이지만 통설을 뒤엎 고 대성했다.그것은 한국바둑계의 행운이기도 했다.
「도전5강」의 뒤를 이어 도전5강보다 좀더 강력한 신인 한명이 이렇게 프로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바로 이무렵 그러니까 84년 여름,전주의 우량아 이창호가 연희동 조훈현의 집으로 살며시 옮겨왔다.
한국에선 최초로 내제자가 된 이창호,그러나 외양은 뚱뚱하고 뭉툭해보였고 프로들은 그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이창호는 어눌했고 입을 꿰맨듯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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