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1950년대 동남아 최고 갑부 何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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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 26면

홍콩에서 교자를 타고 외출하는 호퉁. [김명호 제공]

아편전쟁에서 완승한 영국은 청나라 조정을 윽박질러 홍콩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청은 무인도나 다름없는 섬 하나를 은혜를 베푸는 셈 치고 주었다며 오히려 '영국인의 무지함'을 비웃었다. 청은 내심 천혜의 항구인 닝보(寧波)를 내놓으라고 할까봐 우려하고 있었다. 청으로선 또 전투마다 전멸은 당했어도 항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웃지 못할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1841년 1월 26일 홍콩은 정식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서구의 상인과 군인들이 홍콩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10여 년이 지나자 거리엔 중국인 엄마의 손을 잡고 다니는 혼혈아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중·서 문화 교류의 가장 확실한 결정체였다.

혼혈아들은 1850년대와 1860년대에 급속도로 늘어났다. 부모들은 따로 사는 경우가 많았다. 19세기 중엽 중국인과 서구인은 생활 습관이 워낙 달라 함께 생활하는 게 도저히 불가능했다. 자녀들은 엄마와 함께 외가에서 살며 전통적인 중국식 가정교육을 받다가, 진학 연령이 되면 영국인이 설립한 정부중앙중학(政府中央中學) 등에서 서구식교육을 받았다. 모든 부담은 아버지 쪽에서 하는 게 관행이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이 극소수였던 시절이었다.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한 혼혈아들은 자라서 중·영 무역의 교량 역할을 했다. 영국인 회사에 취업해 일을 배운 후 독립해 부를 축적한 미남 혼혈아들이 늘어났다. 총명하지 않은 혼혈아는 없다는 말도 생겨났다. 생활방식과 행동은 중국인보다 더 중국적이었지만 사고는 서구적인, 그래서 가장 홍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후일 홍콩경제의 지주(支柱)가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1950년대 동남아 최고의 갑부 소리를 듣던 호퉁(何東, Sir Robert Ho Tung, 1862~1956)이다.

호퉁은 16세 때 단 한 명만 선발하는 광둥 세관원 모집시험에 합격했다. 높은 보수에 안정된 직장이었다. 2년을 근무했다. 어느 날 문득 세관은 발전할 기회가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로 사직했다. 홍콩 이화양행(怡和洋行)에 중·영 무역부 통역으로 취직한 호퉁은 2년 만에 계열사인 홍콩화재보험과 광둥해상보험의 경리를 겸직하게 됐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형화재가 발생하고, 해상에선 선박 충돌사고가 없는 날이 없을 때였다. 뛰어난 언변과 성실 하나로 깜쫑(金鐘)과 쭝환(中環) 일대의 땅을 시가의 1%에 불하받아 홍콩 부동산계의 깨질 수 없는 기록을 세운 호퉁은 1900년 친동생 호푸(何福)를 후임으로 추천하고는 20년간 근무하던 이화양행에서 퇴사했다. 풍부한 경험을 쌓은 그는 이미 홍콩 중국인 상단(商團)의 영수가 되어 있었다.

호퉁은 1906년부터 홍콩과 구룡(九龍)반도 일대의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중구(中區)와 영국인 거주지역인 반산구(半山區)의 토지를 야금야금 구입했고, 구룡공원에서 몽콕(旺角)까지 대로변의 낡은 건물과 신계(新界)의 땅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불과 몇 년 사이에 홍콩의 대지주가 된 그는 사들인 땅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건물명에는 그의 이름인 ‘동(東)’과 부인의 이름에서 따온 ‘영(英)’을 많이 사용했다. 그의 건물들은 볼품없고 큰 것이 특징이었다. 완공된 후에도 층수를 계속 높였기 때문이다. 작은 건물은 예뻐야 하지만, 워낙 크다 보면 모양은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호퉁은 많은 일화를 남겼다. 정변에 실패하고 도망 온 캉유웨이(康有爲)를 숨겨주었고,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전투기를 구입해 중국에 보냈다. 아들도 중국군대에 입대시켰다. 아들 한 명 정도는 전사해야 집안에 체면이 선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훗날 친황다오 요새사령관까지 역임하며 중장으로 전역했다. 호퉁은 80세부터는 어디를 가든지 걸어다녔고 공원에 갈 때만 교자(轎子)를 탔다. 홍콩인에게 처음 수여되는 작위를 받으러 영국에 갈 때는 중국 전통복장을 했고, 세 명의 부인도 중국 여자였다. 애인도 모두 중국인이었다. 며느리와 사위도 중국인이 대부분이었다. 94세로 세상을 떠나는 날에도 그는 두뇌운동을 위해 황금 가격과 런던·뉴욕·도쿄의 주가를 세 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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