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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합작 '위조 비즈니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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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 코넬대와 와튼 스쿨(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수재, 선진 금융기법으로 무장한 30대 투자 천재. 5일 기소된 김경준(41)씨는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하지만 검찰 수사로 베일이 벗겨진 그의 정체는 '위조의 달인'이자 '천재적인 사기꾼'에 불과했다.

김홍일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는 5일 수사 결과 발표 때 "2001년 5월부터 2002년 1월 미국 국무부 장관 명의 여권 7장, 네바다주 국무부 장관 명의의 19개 법인 설립 허가서를 위조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위조한 7개의 여권에는 대학 교수와 영화배우, 미 LA 시의회 의장, 대학원 동창 이름까지 동원됐다고 한다. 암으로 숨진 동생(Scott Kim)의 여권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 이렇게 위조된 여권은 '유령회사'를 만드는 데도 유용하게 쓰였다. 19개의 유령회사 법인 설립 허가서는 금융감독원에도 버젓이 제출됐다. 위조의 백미는 검찰에 제출한 '이면계약서'였다. 자신의 결백과 이명박 후보가 연루된 사실을 밝혀줄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면계약서는 계약 체결 1년 뒤 위조한 것이라고 검찰에 고백했다.

김경준씨의 사기 행각에는 미국 LA에 머물고 있는 누나 에리카 김(43) 변호사와 부인 이보라(37)씨까지 적극 동참했다. 가족이 동원된 '사기 비즈니스'인 셈이다.

최재경 특수수사팀장은 5일 "김경준씨의 주가조작.횡령 및 사문서 위조 범행의 공범으로 에리카 김을 상대로 범죄인 인도를 청구키로 결정했다"며 "부인 이보라씨도 공범으로 수배 중이지만 형평상 청구 대상에서 일단 제외했다"고 말했다. 이보라씨를 청구할 경우 부부 모두 구속 대상이 돼 현재 김씨 부부 사이 어린아이의 양육 문제 등 형평을 고려했다는 의미다.

에리카 김은 동생 김씨가 2000년 7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옵셔널벤처스코리아 대표로 재직하는 동안 회사 돈 319억원을 해외 유령회사를 통해 빼돌리는 과정에 같은 회사 임원으로서 공모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이날 발표에서 "eBK증권사 설립 과정에 100억원을 출자했던 미국 유령회사 AM파파스의 주소가 에리카 김의 로스앤젤레스 변호사 사무실로 돼 있고, 에리카 김이 직접 계좌를 만들어 돈을 보냈다"고 지적했다.

미국 법원의 김씨 송환 결정문에도 "김경준과 에리카 김이 범행의 이득을 본 장본인"이라며 "횡령금으로 에리카 김은 동생과 함께 수백만 달러의 베벌리힐스 고급 주택 두 채를 사고 스위스 계좌로 자금을 송금했다"고 적시했다.

에리카 김은 95년 '나는 언제나 한국인'이라는 자서전을 통해 성공한 변호사로 국내에 알려졌다. 코넬대학과 캘리포니아주립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법학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90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명박 후보와 김경준씨를 소개해준 것도 에리카 김이었다. 하지만 현재 미국 연방 검찰에서 문서 위조와 돈세탁, 허위 세금 보고 등의 혐의로 조사를 받고 10월 현지 법원에서 범죄 사실을 인정한 뒤 변호사 자격을 반납한 상태다.

부인 이씨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98년 환은살로만스미스바니증권에서 김씨와 함께 일했다. 이씨는 99년 김씨가 세운 BBK에 등기이사 겸 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옵셔널벤처스 계좌에서 319억원을 빼낼 당시 이씨는 자금 인출과 돈세탁을 지휘했다는 것이 직원들의 증언이다. 검찰은 2001년 남편보다 먼저 미국으로 도피한 이씨를 기소 중지했다. 이씨는 이번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도 LA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글 이면계약서'를 포함한 네 종의 문서 사본을 증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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