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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혁명 기지’ 황포군관학교의 탄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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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 26면

1924년 6월 16일 황포군관학교 1기생 입학식에 참석한 쑨원(가운데). 오른쪽에 군복을 입고 차렷 자세로 서있는 이가 교장 장제스. [김명호 제공]

황포군관학교는 소련 홍군의 건군 원칙과 작전 경험을 바탕으로 쑨원(孫文)에 의해 설립된 중국 최초의 현대적 군사학교다.

쑨원은 가는 곳마다 혁명을 역설했지만 군사력이 없는 혁명가였다. 그에게 감복한 용감하고 성질 급한 동조자들이 수없이 죽어갔지만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나중에는 군벌의 역량을 이용해 혁명을 완수하려는 환상까지 품게 되었다. 1921년 코민테른 대표 마링이 군관학교 건립과 혁명군대 창설을 건의했다. 소련을 모방해 혁명군대를 양성하지 않는 한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고 쑨원을 설득하며 지원을 약속했다. 갓 창당한 공산당으로부터는 군사투기꾼이라는 소리까지 듣던 참이었다. 건의와 독촉과 필요성에 의해 쑨원은 1924년 국민당을 개조하고 공산당과 합작해 군관학교 설립에 착수했다.

광저우(廣州) 교외 황포 나루터 건너 창저우다오(長洲島)에 있던 광동육군학교(廣東陸軍學校)와 해군학교(海軍學校)가 사관학교 부지로 선정되었다. 교명은 ‘육군군관학교’였지만 황포에 위치했기 때문에 ‘황포군관학교’라고 부르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정식 명칭처럼 되어 버렸다. 운영은 소련 홍군의 정치위원 제도를 본받았다. 혁명간부를 양성하고 군벌 관료의 도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당에서 대표를 파견했다.

모든 명령은 당대표를 경유해 교장이 집행하게 했다. 당대표를 거치지 않은 교장의 명령은 무효였다.

쑨원은 초대 교장으로 청첸을 염두에 두었고, 장제스(蔣介石)와 리지션(李濟深)을 부교장에 임명하려고 했다. 광동군사령부 참모장이었던 장제스는 반발했다. 당과 군 경력이 가장 후배였지만 청첸의 밑에는 있을 수 없다며 광저우를 떠나 상하이로 가버렸다. 쑨원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불만을 토로했다. 상하이에 있던 국민당 원로들이 광저우까지 와서 쑨원을 설득했다. 결국 장제스를 교장에 임명하고 부교장 제도는 없애버렸다. 쑨원은 장제스에게 온갖 추앙을 다 받았지만 그것은 사후의 일이다. 생전에는 장제스 때문에 체면을 깎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학생 모집은 광저우에서 공개적으로 했다. 군벌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의 공산당과 공산주의청년단 지부는 군벌들 몰래 응시생을 모집해 광저우로 보냈다. 선발 기준은 엄격했다. 선발이 끝난 후 도착한 쓰촨 지역 응시생 20여 명을 추가로 합격시킨 것을 포함해 1기생 639명을 선발했다. 이들의 문화 수준은 다양했다. 해외 유학생과 대학생에서부터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사람 등 각양각색이었다. 후배들에게 창군의 주역이 되어 통일과 혁명의 제단에 고귀한 선혈을 뿌려야 한다며 해외에서 지원자를 모집해 직접 광저우까지 인솔해 온 유학생도 있었다. 그중에는 혼자 돌아가자니 눈치가 보여 어쩔 수 없이 응시했다가 후배들은 떨어지고 혼자만 합격한 사람도 여러 명 있었다.

1924년 6월 16일 1개월간 기초교육을 받은 1기생들의 입학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쑨원은 “중국혁명이 지지부진하고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진정한 무장혁명 대오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간 무장 세력들은 혁명이라는 미명하에 사욕에만 탐닉한 인민의 죄인이었다. 우리의 사명인 진정한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당을 개조하고 군대를 소유하고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정책을 제시하고 실현해야 한다. 우리의 무력은 민중과 결합해야 하고 결국은 인민의 무력이 돼야 한다”고 생도들에게 훈시해 축하하러 온 군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황포군관학교는 1927년 4월 폐교될 때까지 1만5400여 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존속기간은 3년에 불과했지만 무수한 혁명가와 군사가를 배출한 세계 4대 사관학교 중 하나였다. 졸업생 중에는 4기 24명, 7기 34명 등 총 58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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