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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궁의 추억 잊고 이젠 배심원 설득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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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 09면

지난달 28일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 세미나실에서 부장검사들이 공창제를 주제로 정책토론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토론 훈련은 재판에서 변호사의 주장에 곧바로 대응할 수 있는 순발력을 길러준다. 검사들은 3일간의 연수를 통해 5분 스피치와 방송토론 등 다양한 교육을 받는다. 최정동 기자

“낙태를 허용해야 하는가?”

검찰은 어떻게 준비하나

이 주제를 놓고 찬성하는 부장검사 2명과 반대하는 부장검사 2명이 편을 갈라 토론에 나선다.

“여성의 사생활 보호는 중요한 기본적 인권이고, 이러한 기본권에는 낙태의 권리가 포함됩니다.”

“낙태를 허용하면 낙태 과정에서 산모나 태아가 죽거나 건강을 해치는 등 생명권을 침해하게 됩니다.”

토론이 끝나면 동료 부장검사와 강사로 구성된 평가단이 점수를 매긴다. 토론 과정을 녹화한 동영상도 함께 감상한다. 이때 누구는 말이 너무 빠르고, 누구는 제스처가 너무 과장되고, 누구는 턱을 너무 쳐드는 등 자세가 좋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참여재판제 도입을 앞두고 검사들을 대상으로 실시 중인 정책토론 교육 과정의 한 장면이다.

사실 검사들은 공판정에서 판사를 설득하는 것보다 조사실에서 피의자를 추궁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조사를 충분히 하면 그것이 자세히 수사기록에 반영된다. 검찰은 그 수사기록을 갖고 재판에 나서면 유죄 여부를 가릴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참여재판이 실시되면 법률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인 배심원이 수사기록을 읽어보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법조인들이 사용하는 법률용어를 그대로 사용해서는 배심원이 사건을 이해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검사는 법정에서 배심원들이 알기 쉬운 용어를 사용해서 주장하고, 사건내용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야 한다. 예를 들면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검사는 ‘합리적 의심이 없는 정도’로 유죄를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합리적 의심’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검사는 “보행 신호등을 직접 본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동시에 도로를 건너갔다는 것이 입증된다면, 보행자 신호가 켜졌다는 것은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입증된 것”이라고 풀어서 설명해야 한다.

배심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진이나 도면 같은 시청각 자료도 보여주어야 한다. 오랜 기간 사건이 진행된 것이라면 시간적 순서에 따라 표를 만들거나, 사건의 전모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파워포인트 자료를 제작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변화는 수사 과정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검사는 수사 초기단계부터 배심원을 상대로 한 효과적인 입증을 염두에 두고 조사에 임해야 한다. 강도 강간으로 기소된 택시기사인 피고인이 자신이 운행한 태코미터(주행기록기)를 증거로 제시하면서 알리바이를 주장한다고 하자. 그런데 사실 태코미터는 기술적으로 조작이 가능하다.

여러 번에 걸쳐서 형사사건을 담당한 재판부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처음으로 재판에 참가한 일반인인 배심원으로서는 조작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렵다. 검사는 미리 관련 전문가를 참고인으로 확보해서 태코미터가 조작될 수도 있다는 점을 배심원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검찰은 대검과 일선 검찰청의 검사들로 구성된 ‘국민참여재판준비팀’을 만들어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 먼저 검찰 내 교육활동을 강화했다. 법무연수원에서 각종 토론·스피치 교육은 물론 모두진술, 신문기법, 최후 논고방법 등 다양한 강좌를 개설하여 전국 검사를 상대로 교육하고 있다. 또 10월부터 12월까지 13명의 전담 검사가 미국을 방문해 재판을 참관하는 계획을 진행 중이며, 배심 재판 훈련 전문기관인 미국 NAC(National Advocacy Center)에도 검사 7명을 파견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유·무죄의 인정과 양형을 정하는 데 국민이 참여하는 것은 사법에 있어 국민주권을 행사하는 획기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준비와 실시 비용 등의 부담이 크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한정된 국가자원(예산)을 사법 절차에만 무한정 투자할 수도 없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수사기관과 재판기관에 협력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피고인에 대해서는 법률이 정하는 범위 내에서 형을 줄여주면서 정식재판 대신 간략한 재판을 하도록 해 국민의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사법절차를 운영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검사와 피고인이 법절차에 따라 협의한 다음 판사가 유죄를 뒷받침할 증거가 있는지, 형량은 적정한지를 심사해 정식재판 못지않게 공정한 결과를 보장하면서도, 사법비용을 줄이자는 것이다. 배심 재판 전통이 확립돼 있는 미국에서 ‘플리 바기닝(plea bargaining·자백감형제도)’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제도를 오랫동안 운영하고 있고, 프랑스·독일 등에서도 이 제도를 도입했거나 도입을 추진 중이라는 점은 참고할 만하다.

검찰은 법원·변호인·학계와 긴밀히 협조해 문제점이나 미비점을 보완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이 제도가 국민 지지를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정착해서 국민의 사법참여라는 취지를 달성함은 물론 우리나라 사법제도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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