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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ve CEO] “한강 둔치 쥐떼를 소탕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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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쥐 잡는 날’을 최초로 제안했던 전순표(73) 세스코 회장. 그는 우리나라 ‘쥐박사 1호’다. 그것도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장학생으로 영국 본토에서 공부한 유학파 엘리트. 그의 창조적 경영 발상은 어디서 왔을까?


2000년대 초 유행했던 ‘세스코 유머’ 한마디부터 옮겨보자.

Q : 아내가 바퀴벌레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퀴벌레가 아내로 둔갑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듭니다. 어떡하죠?

A : 이미 둔갑한 상태라면 외형상으로는 구별하기 어려우나 바퀴벌레는 서식처에 ‘변’을 배출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혹시 화장실 이외의 공간에 변을 배출하는지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1970년대 매달 25일은 ‘쥐 잡는 날’이었다. 학교마다 플래카드가 나붙고, 어린 학생들은 ‘오늘은 쥐 잡는 날’이라고 쓰인 노란 명찰을 가슴에 붙이고 등교했다. 젊은 세대에게는 ‘그때를 아십니까’에서나 볼 법한 황당한 광경. 하지만 당시에는 온 식구가 동원돼 치러야 했던, 꽤나 진지한 월례행사였다.

쥐 잡는 날은 농림부에 근무하던 한 공무원이 제안해 시작됐다. 너 나 할 것 없이 가난하던 시절, 정부양곡을 보관하는 창고에서 쥐가 먹어치우는 쌀의 양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된 젊은 공무원의 분기탱천이 만들어 낸 제도였다.

당시의 젊은 관리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쥐를 잡고 있다. 다만 ‘오늘은 쥐 잡는 날’이라는 명찰은 ‘화재신고는 119, 해충신고는 1119’라는 마케팅 슬로건으로 바뀌었다.

‘쥐 잡는 날’을 최초로 제안했던 주인공인 전순표(73) 세스코 회장은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사람 먹을 것도 모라자는 판에 이를 축내는 쥐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선친께서 면장을 지내셨는 데도 살림이 넉넉하지 못해 밥 한 끼 배불리 먹기가 어려웠습니다. 당시에는 어느 집이나 그러했듯 밥을 먹다가 밥알을 조금만 흘려도 불호령이 떨어지고는 했죠. 학교를 졸업한 뒤 농림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정부양곡을 보관하는 창고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보관 중인 양곡이 쥐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온 국민이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는 판국에 소중한 양곡을 먹어치우는 쥐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때부터 식량을 증산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어떻게 해서든 쥐를 잡아야겠다는 결심을 세웠다고 한다. 요즘의 관점으로 생각한다면 다소 황당한 발상 같지만 당시에는 그만큼 쥐로 인한 피해가 심각했다.

그러던 중 전 회장은 정부의 도움으로 영국 유학을 하게 됐다. 그는 영국에서 작심하고 쥐에 대한 연구와 방제기술을 익혔다.

한 공무원이 ‘쥐 잡는 날’ 제안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제일 먼저 ‘쥐 잡는 날’을 제안했다. 그는 쥐잡기의 필요성을 홍보하고 쥐잡기 운동을 직접 이끌기도 했지만, 예산의 제약과 공무원 신분의 한계를 절감해야 했다.

전 회장은 고심 끝에 모험을 감행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선망의 대상인 중앙부처 공무원 신분을 과감히 집어던지고 창업에 나섰다. 1976년 우리나라 최초의 방제회사인 ‘전우방제(세스코의 전신)’는 이렇게 탄생했다.

“영국의 양곡 보관법을 연구할 정부장학생으로 선발돼 2년 동안 영국에 가서 쥐에 대한 공부를 했죠. 영국은 농산물 수입국으로 오래 전부터 양곡 보관과 쥐나 해충 퇴치 기술이 매우 뛰어난 나라입니다. 또 관련 법이나 제도도 잘 발달해 있죠. 영국에서는 모든 국민이 자신이 소유한 땅이나 건물에서 쥐가 나타나면 무조건 신고해야 합니다. 신고하지 않으면 꽤 많은 벌금을 내야 합니다. 신고를 하면 어떤 약을 언제까지 투약해서 잡든지 아니면 쥐를 잡아주는 회사에 의뢰를 하라고 알려줍니다. 사실은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 쥐를 대신 잡아주는 방제회사를 설립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이때 얻었죠.”

하지만 당시 쥐를 퇴치하는 방법이라고는 쥐덫을 놓거나 고양이를 키우는 게 고작이었던 한국 땅에서 해충방제회사가 설 자리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단돈 100원이면 쥐약을 살 수 있던 시절, 비싼 돈을 주고 그를 불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손님을 기다리는 대신 직접 찾아나서 보기도 했지만 잡상인 취급을 받거나 냉소를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애초부터 시간싸움이라는 생각을 했던 전 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고객들을 설득했다.

결국 당시 여의도에 있던 모 쇼핑센터가 첫 고객이 됐다. “3개월 안에 쥐를 한 마리도 남김 없이 잡아주지 않는다면 돈을 한푼도 지불할 수 없다”는 불평등한 계약이었지만 그나마도 감지덕지였다.

그러나 약삭빠른 쥐들은 전 회장에게 쉽게 당해주지 않았다. 무분별한 쥐약 사용으로 쥐들이 이미 ‘약 기피증’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였던 것. 업주는 당장 계약파기를 요구했다. 그렇다고 거기서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 전 회장은 다시 한번 끈질긴 설득으로 1개월의 유예기간을 얻어냈다.

밤을 새운 연구와 궁리가 계속되고, 알고 있던 모든 방법이 총동원됐다. 그 결과 마침내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냉대하던 업주도 쥐가 완전히 없어질 때쯤에는 태도가 달라졌다. 나중에는 쇼핑센터에서 주변에 입소문을 내며 홍보역할을 자처했다. 이 쇼핑센터는 지금까지도 세스코의 고객으로 남아 있다.

사람이 먹어도 안전한 방제법 고안

“당시에는 정부나 국민이나 눈 앞에 쥐만 안 보이면 그만이라는 식이었으니 방제회사를 차리면 고생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방제 개념도 희박했고, 또 방제사업을 매우 하찮게 여기는 풍토였으니까요. 그렇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공무원을 하거나 교육직에 있으면 개인적으로는 편하게 살 수 있었겠지만 애써 배운 방제기술은 그냥 묻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 내다보고 방제회사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나라에서 유학까지 보내주면서 익힌 기술이니 만큼 국민을 위해 사용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기술과 경험이 더욱 쌓이고 평판도 좋아지면서 고객은 하나둘 늘어났다. 1970년대 말에는 청와대가 고객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고객이 400여 곳으로 증가했다. 당연히 매출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회사를 확장해 보라’거나 ‘프랜차이즈 방식으로 가맹점을 받으라’는 식의 조언을 했다. 하지만 전 회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철저히 직영점 체제를 고수했다. 고객에게 동질의 고급서비스를 제공하려면 직영점 체제가 바람직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영업에도 나서지 않았다. 대형빌딩이나 대단위 아파트단지 등과 계약할 때 리베이트를 요구하는 관행이 싫어서였다. 대신 먼저 연락을 해온 아파트나 빌딩에만 방제서비스를 제공했다. 이 때문에 한때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결국 기술 투자에 집중한 그의 전략은 시장에서 인정을 받았다.

“흔히 방제라고 하면 약이나 뿌리고 쥐덫 같은 것이나 놓으면 저절로 잡히는 줄 알지만, 그건 오해입니다. 쥐나 해충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에 맞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써야 방제가 되지 대충 약 냄새나 풍겨서는 절대로 해충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위생업소의 해충방제를 의무화하는 전염병예방법이 공포된 후에 방제회사들이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실제 몇 달 사이에 2,000개 가까운 회사가 생겼다. 하루에도 고객사 수십 곳에서 해약요청이 쇄도해 다시 고비를 맞았다. 다시 그의 말이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죠. 이러다가 회사 문 닫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해약했던 고객사에서 먼저 연락을 해오더군요. 혈연이나 지연, 학연 등을 빌미로 방제 계약을 했는데, 해충이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기승을 부려 견디지 못했던 것이죠. 역시 기술 차이였습니다. 우리 회사가 어느 정도 성장을 하자 농약이나 쥐약 제조업에 진출해보라는 권유도 받았지만 역시 전문화를 위해 포기했습니다.”

전순표 회장은 대신 팜클을 설립했다. 해충방제를 위한 전문적인 약제를 제조하는 회사였다. 세스코는 방제기술 축적에 더욱 전념하고 팜클은 전문적인 약제를 개발, 생산하는 전문화의 길을 택했던 것. 세계화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바로 그것이었다.

63빌딩 방제 위해 한강 둔치 쥐 소탕령

세스코의 남다른 기술력은 방제기술에 아무런 지식이 없어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기술이 뒤처지는 업체들은 연막이나 스프레이식 약품을 잔뜩 뿌려대지만, 이는 해충이 아니라 사람을 잡을지도 모르는 구시대적 방제법이다. 시각적 효과 외에는 실제 방제효과가 거의 없다는 얘기다.

반면 세스코는 먹이타입 방제 기술을 사용한다. 먹이타입 방제기술은 방제 대상 해충에게 적합한 먹이를 극소량만 사용해 환경 오염과 혐오감을 줄이면서도 효과는 매우 탁월한 방제법. 바퀴벌레나 개미, 쥐 같은 해충들은 인간에 비해 몸무게도 적고 크기도 매우 작기 때문에 극미량의 독소만 투입해도 방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란다.

“특히 세스코에서 사용하는 방법은 실수로 사람이 먹는다 해도 인체에 별다른 피해가 없을 정도로 안전하다”는 게 전 회장의 설명이다.

아무리 세스코의 기술력이 뛰어나다지만 핵 전쟁이 터져도 살아남는다는 쥐와 바퀴벌레를 상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게 마련. 더구나 외부에서 침입하는 해충들까지 모두 막아내기란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 실제로 세스코는 바깥에서 들어온 쥐 한 마리 때문에 회사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다.

1990년대 중반 63빌딩에서 일어난 일이다. ‘회장님’께서 빌딩 로비를 걸어가는데 쥐 한 마리가 그 앞을 유유히 지나가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당연히 “도대체 방제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이런 일이 생겼느냐”면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시 63빌딩 방제를 맡고 있던 회사는 다름 아닌 세스코. 한 걸음에 달려간 세스코 임직원들이 조사를 해보니 그 쥐는 63빌딩 앞 한강 둔치에서 들어온 놈이었다. 둔치의 쥐를 모두 소탕하지 않는 한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할 법한 일이었지만 전 회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6만6,000m2(2만 평)에 이르는 한강 둔치 전체의 방제작업을 지시했다. 이때부터 세스코 ‘요원’들은 매일 한강 둔치로 출근해 쥐와 해충들을 때려잡는 소동을 벌였다. 이 작업에 들어간 돈만 4,000만 원이 넘었다. 불가능할 듯 보였던 작업은 3개월이 지나자 비로소 성과를 나타냈다. 한강 둔치에서 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계약조건에 둔치를 방제한다는 조항은 없었습니다. 담당자도 손해를 보면서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반대했죠.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그것이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비록 금전적으로는 손실이 발생했지만, 이 작업으로 저희는 돈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얻었습니다. 고객의 확고한 신뢰와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라는 평판이었죠.”

회사 도약 일등 공신 ‘세스코 유머’

세스코의 서비스 정신을 말할 때 회사 홈페이지를 빼놓을 수 있을까? 세스코가 우수한 기술을 대중에게 알리고 좋은 이미지의 기업으로 떠오른 것은 지난 2000년 개설한 홈페이지의 ‘Q&A’ 코너가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세스코는 2000년대 대중매체광고를 실시했다. 회사 인지도를 높이고 내부고객만족도도 높이자는 차원이었다. 세스코의 광고는 해충방제업체로는 국내 최초였던 탓에 업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신선한 충격을 던졌지만, 광고효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고 한다.

다른 홍보방안을 고심하던 세스코는 기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광고 실시와 비슷한 시기에 개설한 회사 홈페이지 게시판의 접속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것. 홈페이지가 유달리 독특한 것도 아니었고 또 웬만한 기업들보다 훨씬 늦은 2000년 7월에야 오픈했기 때문에 갑자기 유명해진 데 대해 세스코 직원들도 당황했다.

또 Q&A 코너도 해충 전문 질문답변 게시판이었을 뿐, 마케팅이나 전략적인 운영 방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고객의 질문에 해충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충실하게 답변한다는 원칙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한 홈페이지 방문자 수는 개설 1년이 지났을 때쯤에는 하루 10만 명을 돌파하며 서버가 다운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게 무슨 일인지’ 조사에 나선 세스코는 Q&A 게시판의 답변에 감동한 네티즌이 ‘이렇게 친절한 기업도 있다’는 제목으로 다른 게시판에 세스코의 답변내용을 소개해 입소문을 타면서 일어난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해충방제회사의 홈페이지라는 이유로 호기심과 장난기가 발동한 네티즌들이 장난 섞인 글을 Q&A에 올렸는데, 그런 질문도 고객이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기술연구소 연구원들이 일일이 친절하고 재미있게 답변한 것이 네티즌을 감동시킨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홈페이지 Q&A의 인기는 인터넷 유머 포털사이트들을 석권하고 스포츠 신문의 유머란을 장식할 정도로 뜨거웠다. 이러한 유명세는 각종 언론의 관심과 보도로 이어졌고, 세스코는 일약 최고의 서비스 기업으로 알려지게 됐다.

세스코는 어떤 질문을 해도 모두 답변해 주는 친절하고 똑똑한 회사로 젊은 층의 관심과 지지를 얻었다. 급기야 기업으로는 최초로 인터넷에 순수 팬클럽이 생기는 영광까지 안게 됐다.

몇몇 직원의 기지에 힘입어 일어난 우연한 사건처럼 보이지만 사실 세스코 임직원들이 독특한 유머감각을 갖게 된데는 전 회장의 힘이 컸다. 전 회장은 고정관념을 깨는 독특한 마케팅 아이디어를 손수 짜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1996년 창립 2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쥐, 바퀴벌레 위령제’도 그가 고안해낸 아이디어다. 그 동안 죽어간 쥐와 바퀴벌레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연 이 행사는 많은 이들의 흥미를 유발시킨 사회적 이슈였다.

‘쥐와 사투를 벌여오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다’는 마음으로 치렀던 이 행사는 회사 홍보에 큰 역할을 담당했고 이를 계기로 세스코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이러한 재치있는 전략은 권위적인 모습을 버리고 대중에게 친근하게 접근한다는 점에서 인터넷 게시판 현상과 동일선상에 있다.

중국 필두로 세계시장 진출에 박차

세스코의 산업체 시장 점유율은 80%에 이르며 특히, 해충방제가 가장 어려운 백화점과 특급호텔에서의 점유율은 90%에 달한다. 또한 인천국제공항·코엑스·63빌딩·서울대학병원 등 초대형 시설물의 대부분이 세스코의 고객이다.

한 나라의 해충 방제 시장을 80% 이상, 특히 특급호텔, 백화점, 식품공장, 대형 복합건물, 종합병원 등의 시장 점유율을 거의 90% 이상 가지고 있는 해충 방제회사는 전세계에서도 드물다. 하지만 전 회장은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얼마 전 해외시장 공략을 선언하고 중국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해충은 그 습성상 서식환경에 적응력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세계적인 방제회사라 하더라도 세계시장에 진출하기가 쉽지 않다. 같은 종류의 해충이라도 미국에 사느냐, 한국에 사느냐에 따라 그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회장은 적어도 한국과 환경적 특성이 유사한 아시아 시장에서는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판단한다.

“상하이에 현지법인을 설립했는데, 이미 본격적인 성장가도에 올라선 상태입니다. 하지만 상하이 현지법인 설립은 세계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지 중국시장 진출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에서의 성공을 발판 삼아 미국이나 유럽에 진출해서 방제시장을 석권하고 싶어요.”

세스코는 상하이에 이어 베이징·칭다오·쑤저우 등에도 지사를 설립할 예정이다. 그렇지만 중국시장 공략이 뜻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중국이 낙후된 환경 때문에 사업 기회가 매우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해충방제나 환경 자체에 대한 인식이 낮은 만큼 난관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세스코의 기술력과 서비스는 중국시장에서도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상하이지사의 급속한 성장세가 그 증거죠. 머지않아 중국은 물론 미국이나 일본, 유럽에서도 세스코가 전문방제기업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는 날이 올 겁니다.”

전순표 누구인가?
1935년 강원도 정선 출생
1953년 동국대학교 졸업
1957년 농업시험장 기초연구과
1961년 농림부 식물 방역과
1964년 영국 런던대학교 연수
1976년 전우방제 창업
1992년 한국방역협회장
2000년 전우방제가 세스코로 사명 변경
2006년 국제로터리 3650지구 총재

우리나라 백화점과 특급호텔 등의 90%는 세스코의 서비스를 받고 있다.

정일환 월간중앙 기자 wha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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