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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의 창고, 여유의 미학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7호 06면

우리나라에서만 한 해 100개가 넘는 잡지가 창간되고 폐간된다. 인터넷 덕에 손쉬운 1인 미디어 시대가 열렸는데도 왜 종이로 된 정기간행 매체에 대한 자본의 투자가 끊이지 않는 걸까.

생활과 함께해온 雜誌

개인 웹 미디어는 돈이 거의 들지 않지만 오프라인 정기간행물의 발간에는 엄청난 자본이 들어간다. 블로그는 아무나 마음대로, 심지어 익명으로 개설해도 되지만 잡지류는 정기간행물 등록법에 따라 발행인이 꽤 복잡한 요건을 갖춰 신고 서류를 챙겨야 한다. 잡지 시장은 불황이라는 데 성공한 기업은 여전히 앞다퉈 질 좋은 종이의 사외보를 찍어 무료로 배포한다. 사업가의 측면에서 이런 매체를 소유한다는 것은 품격 있는 형태의 홍보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7세기 유럽서 유래, 예술·교양의 요람
영어로 잡지를 뜻하는 매거진(magazine)은 네덜란드어의 magazien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 창고를 의미했다. 그로부터 다양한 내용을 담은 책, 즉 ‘지식의 창고’라는 개념의 잡지로 발전한 것이다. 현재도 매거진은 군사용어에서 창고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잡지의 기원은 17세기 프랑스의 서점에서 애서가들에게 신간을 소개하기 위해 발행했던 도서 목록 ‘르 주르날 데 사방(Le Journal des Savants)’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격적인 의미의 잡지는 18세기 영국의 ‘젠틀맨스 매거진’이 최초인 것으로 알려졌다. 잡지는 유럽 대륙에서 시작되었으나 영화가 그렇듯이 미국에서 꽃을 피웠다. 그중에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처럼 100년 가까이 사랑 받는 편안한 교양지가 있고 ‘타임’이나 ‘뉴스위크’처럼 권위를 인정받는 시사정보지들이 있다.

우리나라도 최초의 신체시라 일컬어지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실렸던 20세기 초 ‘소년’을 시작으로 ‘창조’ 등 문예지와 ‘신여성’ 등 교양지를 거쳐 시사정보지와 문화예술, 학술지, 미용이나 항공 같은 전문 산업지들이 골고루 발간되어 왔다. 1980년대 이후 문예지와 여성지의 전성시대를 거쳐 90년대 후반부터는 ‘리뷰’ ‘이매진’ 등 문화비평지와 ‘페이퍼’ 등 스트리트 매거진(무가지)이 왕성하던 시기를 거쳐 영화잡지의 인기몰이가 이어졌다.

웬만한 문화계 인사치고 한때 이들 잡지에 몸담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20세기 후반 한국의 문화계는 각종 문화잡지를 중심으로 흥망성쇠의 주기를 그려왔다. 요즘도 문학지와 미술(사진·디자인·건축) 잡지, 음악지 등 문화예술 관련 정기간행물은 여전히 상당수가 맥이 끊기지 않고 다양하게 발간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 의문점 하나가 떠오른다. 우리에게는 왜 ‘뉴요커’나 ‘빌리지 보이스’ 같은 종합문화지가 없을까. 예전부터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고, 실제 여러 달을 준비 기간으로 소비한 사업체 얘기도 가끔 들리며 몇몇 잡지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종합문화지를 표방하고 나서지만 안 팔리는 종합선물세트 식 구색 맞추기로 애물단지가 돼버리는 모습을 본다.

한 잡지 칼럼의 필자가 반쯤 농담 섞인 한탄으로 털어놨듯이, 한국 인구가 1억 명이 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어떤 잡지가 생명력을 갖는지는 오래 살아남은 인기 잡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단단한 경영 기반에 분야와 타깃을 명확히 하되 다양한 관심을 꼼꼼히 포괄해야 하는 것이다.

적당히 허술… 눈으로 즐기는 재미도
현대 도시인의 삶 속에서 잡지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정기구독하는 주간지가 월요일 아침마다 배달되어 온다. 말일을 알리는 월간지 소포가 우체통을 묵직하게 누른다. 꺼내어 포장지를 북 뜯는 맛이 있다. 화장실 변기 뒤에 철 지난 잡지 위로 새 잡지들이 척척 쌓인다. 신경 써 인테리어를 한 거실 소파 옆에 특이한 모양의 잡지꽂이가 놓인다. 차 한 잔 하면서 펴들면 분위기가 산다.

잡지를 정기구독하지 않아도 대형 서점에 나가 잡지 코너에 들르면 매대에 깔린 최신호들이 번쩍번쩍한다. 비닐 포장을 해놓은 것들이 많아서 더하다. 어림잡아 세어봐도 1000종은 넘을 듯하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러 가는 길목 가판대에서도 잡지는 지나는 사람의 눈길을 끈다. 동네 서점이나 가판대로 오면 가짓수는 100여 종쯤으로 준다. 사실 이런 곳에서 사지 않아도 얼마든지 잡지를 볼 수 있다. 은행과 미용실에 비치된 잡지는 10여 종 안팎이지만 재미있는 놈만 걸리면 기다리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다. 두꺼운 도난 방지 플라스틱 커버가 조금 성가시다.

이렇게 공짜로 볼 수 있음에도 잡지를 사는 건 부록 때문일 때가 많다. 5000원 하는 잡지에 정가 2만원 하는 립스틱, 3만원 하는 마우스가 부록으로 달린다. 잡지보다 비싼 특별 부록을 얻은 대신 실린 광고를 열심히 봐준다. 광고도 꽤 유익하다. 카페에서 잡지를 산처럼 쌓아놓고 땀을 뻘뻘 흘리며 시를 썼다는, 90년대를 풍미한 신세대 시인이 주로 참고한 것은 기사보다는 광고 쪽이었다.

대시인 김수영도 “빈곤에 마비된 눈에 하늘을 가리켜 주는 잡지 보그… 신성을 지키는 시인의 자리 위”라고 썼다.
잡지에선 적당히 정제된, 적당히 허술한 기사를 읽는다. 차마 책이 되지는 못할 실없는 이야기도 돈 아깝다 욕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광고도 많고 사진도 많으니 적당히 건너뛰면서 후루룩 읽어버린다. 관심 가는 정보는 메모도 하고 오려내 스크랩도 하면서 취할 것은 취하고 난 후 책장에 모셔둘 자리 마련 부담 없이 바로 버리면 된다. 그렇다 해도 다양하면서 조금은 깊이 있는 정보들이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 준다.

좀 더 유행을 선도하는 티를 내려면 명동과 홍대 일대에 해외 잡지를 파는 전문서점을 찾는다. 문장을 읽고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어도 사진과 디자인이 눈을 즐겁게 한다. 잡지에선 글보다는 시각적 측면이 중요하다. 표지는 거의 예술작품 수준으로 공을 들이고 내지의 글자 배열과 멋진 사진은 단순한 정보 전달 이상의 감흥을 준다. 잡지는 이렇게 시각적으로는 화려하지만 가격은 저렴하고 정보량은 부담스럽지 않아야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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