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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시평>문화정책과 문예진흥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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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히틀러 정권의 선전상(宣傳相)이었던 괴벨스는『누구든 문화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자가 있다면 당장 권총을 쏴버리겠다』고 공언했다고 전해진다.문화예술의 창조성.독자성을 말살해 정치권력의 도구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이 한마디에 집 약돼 있다.
하기야 봉건시대때 군주나 왕족들만을 위해 존재했던 유럽 문화예술의 무시 못할 전통을 감안한다면 괴벨스의 그같은 의도도 전혀엉뚱한 발상이라고 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방법과 형태,그리고 그 정도는 다르지만 문화예술에 대한 국가또는 정부 차원의 틈입 내지 개입은 세계 역사상 숙명적인 것이었다.정권의 성격에 따라 탄압이 되기도 하고 협조 내지 지원이되기도 하는데 행하는 쪽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통틀어「문화정책」이라 칭한다는 점이 흥미롭다.받아들이는 쪽이야 어떻게 생각하든「정책」이란 그럴듯한 이름으로 행하면 한 나라 문화예술의 운명을 좌우하는 존재로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이와 관련해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는 문화장관 재임 중『국가는 문화예술을 지도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기 위해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문화정책」의 성격은 과연 어떤 것일까.역대 정권들은 입버릇처럼「간섭 아닌 지원」을 내세웠지만 곧이곧대로 수긍하는 문화예술인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지 궁금하다.문화예술에 대한「정책적인 지원」을 대행하는 곳이 한 국문화예술진흥원이란 기구다.이름 그대로 한국의 문화예술 진흥을 지원하기 위해 탄생한 이 기구는 유신(維新)직후인 73년3월 개원했다는 그 시기적 배경만으로 성격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작년에 개원 20주년을 넘긴 이 문예진흥원이 본래의 설립 목적을 이행하지 못하고 허송세월한 것은 물론 아니다.수많은문화예술인들이 이 기구를 통해 크고 작은 혜택을 받았으며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마련해 이 기구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부각시키려 애써온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이 기구가 과연 이 나라 문화예술 진흥을 지원하기 위한 모든 필요충분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문예진흥원의 문제점이 거론될 때 한결같이 지적되는 것이 자율성.효율성.객관성의 결여다.원장 이하 모든 임원의 임명권을 문화체육부장관이 가지고 있으니 자율성을 지니기 어렵고,그 까닭에운영체계가 지나치게 관료적이어서 비효율.비능률적 이며 뚜렷한 심의 기준 없이 지원 여부가 결정되므로 객관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객관성이 결여돼 있다는 지적은 혜택받지 못한 문화예술인들의 불만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으니 논외(論外)로 치더라도 인사와 운영체계와 관련한 자율성.효율성의 결여는 바로 문예진흥원의위상이다.그것은 91년9월 6대 원장으로 취임한 정한숙(鄭漢淑)씨가 취임사를 통해『본인처럼 소설이나 썼던 외부인사가 느닷없이 원장으로 임명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있어서도 안된다』고 말한데서 집약돼 드러난다.당시 예술원장에 재임중인 鄭씨를 겸직 임명한 것도 꼴이 우습거니와 문화행정의 경험이 전혀 없는인사를 문예진흥을 위한 정책 지원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해온 것이 관계부처의 관행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문예진흥원 뿐만도아니고 그 원장뿐만도 아니다.최고 책임자에서 임원에 이르는 중요한 자리들이「정치 적」배려나 퇴직한 고위 공무원들로 채워지고있음은 예술의 전당.영화진흥공사등 다른 공공예술기관들도 마찬가지다. ***노벨文學賞은 감감 지난 6월 문체부장관은 문예진흥원의 기구축소 방침을 비쳤고 지난주 국정감사에선『문예진흥기금의모금.운용이 주먹구구식이며 진흥사업에 지원되던 공익자금이 작년부터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공박이 나오는등 왜소화의 기미가 뚜렷해지고 있다 .이 기구를 둘러싼 잡음을 감안한 조치일는지도모르지만 계속 늘리고 키워나가도 부족할 판에 축소하려는 방침은문예진흥원의 존재 의미에 대한 정부당국의 입장과 태도를 스스로드러내는 게 아닌가 싶다.때마침 일본이 노벨문학상을 두번째로 수상하게 됐다는 소식이 우리의 문화 정책과 문예 지원의 현주소를 새삼 실감케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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