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 마신 Wine 잠에서 깨어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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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라인 병목을 타고 노을빛 광채가 흘러내린다. 이슬이듯 맺혔다간 또옥…또옥… 바닥에 떨어져 고인다. 산소를 머금은 레드가 잠자던 본능을 일깨운다. 자연이 부여한 맛과 향이 시나브로 기지개를 켠다. ‘신의 물방울’이 비밀의 문을 열고 있다.

묵은 포도주 병에 옮겨 찌꺼기 걸러내면
맛·향 깊고 그윽

와인도 묵을수록 흔적을 남긴다. 타닌과 이물질이 결합해 미세한 찌꺼기, 곧 침전물이 생겨난다. 좋은 와인일수록 많이 생겨 품질을 가르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와인의 온전한 풍미를 맛보려면 마시기 전에 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한 작업이 디캔팅(Decanting)이다.
디캔팅은 와인을 디캔터(뚜껑이 있는 유리병)로 옮겨 담는 일을 뜻한다.

와인사랑 소믈리에 이정희(39)씨는 “디캔팅은 단순한 정화 작업이 아니다”라며 “잠자던 와인의 맛과 향을 깨워주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와인을 다른 병으로 옮기는 동안 타닌은 산소를 마신다. 이씨는 “와인이 공기를 쐬면 맛은 훨씬 부드러워지고 그윽한 향기가 피어난다”고 소개했다.
모든 와인을 디캔팅하는 것은 아니다. 10년 이상 된 풀바디 와인이나 6~10년 정도의 중간 바디 와인이 가장 적당하다. 오히려 30년 이상 된 와인은 맛이 약해져 디캔팅해도 맛이 살아나지 않을 수 있다. 요즘엔 2~3년 된 레드 와인이나 풀바디한 화이트 와인도 디캔팅하곤 한다.

디캔팅은 포르투갈 빈티지 포트 와인을 즐겨 마시던 중세 영국인들에 의해 퍼졌다. 이때 와인 침전물을 없애기 위해 디캔터가 만들어졌다.
디캔터 모양은 생산지역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병목의 길이와 굵기, 배 부분의 지름이 달라진다. 병목을 길게 뺀 형태는 와인의 아로마가 날아가지 않고 오래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서다. 보르도와 부르고뉴 와인에 많이 쓰인다. 오리 모양의 수평적인 디캔터는 밑면이 넓어 단시간에 빠른 산화작용이 가능하다.
디캔팅도 하이테크다. 와인 입자의 균형이 깨지지 않으려면 벽을 타고 흘러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국내 소믈리에 1호 서한정(65)씨는 “디캔팅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와인병과 디캔터 간격은 1~2㎝가 일반적”이라며 “간혹 초보자들은 가슴 높이에서 디캔팅을 하는데 손의 위치는 배꼽 높이가 적당하다”고 지적했다.
디캔팅은 짧게는 몇 분, 길게는 한 시간까지 걸린다. 오래된 와인은 공기와 닿으면 맛이 죽는 경우가 있어 마시기 직전 15분 이내에 디캔팅을 완료하는 것이 좋고 어린 와인은 한 시간 가량 두어도 좋다. 와인 특유의 향과 맛을 만끽하려면 디캔팅 후 바로 마시도록 한다.
디캔터에 넣은 와인은 어둡고 선선한 곳에 보관하되 1주일 이상은 넘기지 않도록 한다. 아무리 좋은 디캔터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와인의 품질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프리미엄 김혜영 기자 hyeyeong@joongang.co.kr
사진=프리미엄 황정옥 기자 ok76@joongang.co.kr
장소협찬=베라짜노

TIP
▶디캔팅 준비물 : 디캔터, 시음용 와인 글라스, 촛대, 성냥, 냅킨, 코르크 스크류, 와인 바스켓

▶디캔팅 순서
1. 와인을 오픈한다.
2. 침전물이 가라앉도록 기다린다.
3. 촛불을 켠다.
4. 와인을 디캔터에 조금 따라 헹군다.
5. 와인 잔에 따라 이상이 있는지 확인한다.
6. 왼손에 디캔터를 약 15도 가량 기울여 잡는다.
7. 와인을 디캔터 벽을 타고 흐르도록 천천히 따른다.
8. 와인이 약 200㎖ 남았을 때 침전물이 흘러 나오는지 촛불에 비춰 확인한다.
9. 침전물이 병 목에 오면 디캔팅을 중단한다.
10. 촛불을 끄고 테이블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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