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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잊혀진 ‘은밀한 추억’을 더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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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 04면

그것은 공룡과도 같았다. 한때 지구의 주인이었던 공룡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듯이, 한 시절 비디오 대여점 ‘빨간 딱지’ 코너에서 제왕으로 군림하던 에로비디오는 어느 순간 새 프로를 내놓지 않게 되었다. 공룡의 멸종을 놓고 추위, 식량 부족, 운석과의 충돌, 지진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제시되긴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듯이 에로비디오의 죽음을 놓고도 갖가지 추측만 난무할 뿐 정확한 사인은 알지 못한다. 아무튼 에로비디오라는, 한국의 영상문화에서 15년 정도 서식하며 한때 엄청나게 번성했던 그 동영상은 이제 사라졌다.

‘젖소부인 바람났네’에서 ‘깃발을 꽂으며’까지

新世紀 에로비디오의 서막
지금 시점에서 에로비디오에 대해 뭔가를 말한다는 건 결국 과거를 떠올리고 추억을 곱씹으며 향수에 젖는 행위가 되어버렸다. 이제 중요한 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에로비디오의 ‘이미지’인 셈이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면 ‘에로’라는 단어가 ‘비디오’를 만날 때다.

두 단어의 결합은 단순한 언어적 합성이 아니라 행간, 아니 자간에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가져오는 화학작용이다. 그 파워는 원천적으로 ‘비디오’에 있다. 1980년대 초에 가정용 VCR이 보급되기 시작했던 한국에서 ‘비디오를 본다’는 행위는 호환·마마에 버금가는 ‘포르노를 본다’는 의미였다. ‘비디오’엔 뭔가 수상한 것이 담겨 있었고, ‘빨간 마후라’부터 시작해 여러 이니셜이 동원된 불법 동영상들은 CD나 온라인으로 유통되어도 항상 ‘XX비디오’라고 표현되었다. 비디오는 우리 시대의 ‘음화’였고, 그 중심에 에로비디오가 있었던 셈이다.

에로비디오를 추억하자면 그 전성기는 아마도 ‘젖소부인 바람났네’가 등장했던 95년 이후가 아닐까 싶다. 물론 그전에도 숱한 에로비디오들이 있었다. 88년 ‘산머루’를 효시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에로비디오의 역사는 ‘에로의 명가’ 유호 프로덕션이 내놓은 ‘야시장’ 시리즈와 ‘트렌드 세터’였던 시네마타운의 ‘정사수표’ 시리즈로 뜨거운 90년대를 열었다.

90년대 중반은 에로계의 양대 산맥이었던 두 업체가 자웅을 겨루었던 시기인데, 먼저 치고 나온 쪽은 유호였다. 바야흐로 문민정부 시대. 유호 프로덕션이 94년부터 97년까지 이어간 ‘성애의 여행’ 시리즈는 폴란드·러시아·헝가리 등 이념이 붕괴된 동구권과 파리·암스테르담 등 자유 향기 물씬한 유럽의 주요 도시를 돌며 토종 한국 남자와 백인 여성과의 섹스라는 ‘판타지’를 현실화한다.

하지만 결정타는 시네마가 날렸다.웬만한 직배 블록버스터 타이틀에 맞먹는 2만5000장을 팔아치웠다는 ‘젖소부인 바람났네’. 진도희라는 ‘거유’ 스타가 탄생했으며, ‘신바람 난 자라부인’부터 ‘흑심 품은 연필부인’까지 수십 종의 부인들이 탄생했고, 에로비디오 산업은 급격하게 팽창했다.
당시 상황은 마치 ‘쉬리’(99) 이후 한국 영화의 양적 성장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예쁜이와 장인의 에로 전성시대
‘젖소부인 바람났네’의 진정한 공로는 에로비디오에서 여배우의 존재를 인식시켰다는 점이다. 재킷 사진의 선정도와 시리즈의 지명도 정도로 비디오를 고르던 관객의 심미안은 조금씩 까다로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진도희에 버금가는 미모와 ‘사이즈’를 원하게 되었는데, 이즈음 정세희와 진주희가 각광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배우의 진정한 전성시대를 연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바로 클릭엔터테인먼트. 세기 말과 세기 초의 대한민국, 가요계에 SM이 있었고 배우계에 싸이더스가 있었다면 에로계의 맹주는 바로 클릭이었다.

이 시기부터 에로를 섭취해온 관객이 있다면 ‘CLICK’이라는 굵직한 대문자 로고가 박힌 비디오 재킷에 손을 댔을 때의 그 저릿한 감동을 분명히 기억할 것이다. 클릭의 작품은 달랐다. 일단 재킷 디자인이 세련됐고, 작품 스타일과 스토리도 기존 에로비디오와 차별화되었다. 타이틀 제목도 유치한 패러디는 최대한 자제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여배우가 달랐다. 이규영·조영원·정희빈은 초기 트로이카를 형성했고, 은빛·박혜린의 매력도 만만치 않았으며, 지금은 본명인 하유선으로 활동 중인 하소연은 수퍼 루키였다. 뒤를 이은 이메일은 예명만큼이나 독특한 ‘필’의 소유자였다. 진도희가 세워놓은 ‘글래머 지상주의’의 전통을 허문 클릭의 미녀군단은 에로비디오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예쁜이들이 클릭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여간첩 리철순’(99)으로 혜성같이 등장한 이시아, ‘프리존’의 간판스타 강민서, 수퍼모델 못지않았던 백지은, ‘미소녀 자유학원’ 시리즈가 키워낸 유리(현재는 가수 ‘성은’으로 활동)와 유진, 작품성 중심으로 과작을 했던 김한, 귀여운 이미지가 강점이었던 이선영, 그리고 유하·차린·박희수·엄다혜·윤영서·하얀 등 수많은 ‘그녀들’의 융단폭격 앞에서 에로계와 관객은 행복했다. 물론 그녀들 뒤엔 최고참 로이 리와 배동진을 필두로 박진위·신영웅·양대선·이득진·이재학 같은 ‘에로 사나이’들이 든든한 서포터스로 버티고 있었다.

주목할 만한 감독들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유호와 시네마라는 ‘두 개의 탑’이 지배하던 90년대는 지나가고, 21세기 에로비디오계는 클릭을 중심으로 수많은 젊은 에로인들이 춘추전국시대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봉만대 감독의 ‘이천년’(2000)은 5년 전 ‘젖소부인 바람났네’만큼 강력한 파워를 지닌 작품이었다.

사람들은 드디어 FF 기능 없이도 볼 수 있는 에로비디오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구사하는 파격적 체위와 카메라 앵글은 작은 혁명이었다. 클릭의 대표이자 연출자인 이승수 감독의 작품은 세련된 자극성으로 이름 높았으며, ‘쏘빠떼 2’의 이필립 감독 또한 클릭 사단의 일원이었다. 이외에도 이강림·박선욱·최원준·장민기·김현태 등의 달인이 현장을 달구고 있었다. 여기에 ‘색화동’이라는, 에로비디오 현장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영화의 극장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공자관 감독은, 아마도 ‘에로 작가주의’의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름일 것이며 그가 연출했던 ‘깃발을 꽂으며’(2003)는 한국 에로비디오의 ‘백조의 노래’일 것이다.

에로비디오 실종사건
이렇게 펼쳐놓으니 에로비디오의 역사와 그 위용은 진정 찬란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구체적으로 꼽자면 2004년 즈음부터 비디오 대여점에 에로 신작은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봉만대 감독은 이미 충무로로 들어왔고, 하유선과 성은이 가수 데뷔를 준비한다는 얘기가 들렸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왜 갑자기 공룡은 쓰러진 걸까?

표면적으로는 비디오 대여점 수가 줄어든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 할 것이다. 자기 살 깎아먹기 식의 영업이나 졸속작의 양산도 큰 이유다. 표현의 수위를 억누르는 심의 또한 한국 에로비디오의 발전을 막았던 주범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합쳐도 직소퍼즐의 한 모퉁이가 빈 것 같은 허전함이 있다. 그래서 이런 추측을 하게 된다.

‘에로비디오 실종사건’의 범인은, 70분에서 길게는 90분에 이르는 그 러닝타임일지도 모른다는 것. DVD로 챕터를 건너뛰고 5분 이내의 UCC 동영상이 대세인 시대에 ‘에로비디오’는 정말 구시대의 유물일지도 모르며, 그러한 변화기에 에로계는 수많은 악재를 겪으며 탄력 있는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에로는 부활할 수 있을까? 그 가능성보다는 당위성을 먼저 찾아야 할 것 같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을 테니까.


월간지 ‘스크린’에 몸담고 있는 김형석씨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에로 비디오 애널리스트’로 불리며 10년 가까이 에로 비디오 칼럼을 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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