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시시각각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문명충돌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석학 새뮤얼 헌팅턴이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주 인용하는 나라가 한국과 아프리카의 가나다. 그는 1960년대 초 한국과 가나의 경제 상황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두 나라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똑같았고, 1차(농업)·2차(제조업)·3차산업(서비스업) 비중 등 산업구조도 거의 흡사했다는 것이다. 제대로 만들어 내는 공산품이 별로 없고, 상당한 규모의 경제 원조에 의존한 점도 비슷했다고 한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반면 가나는 1인당 GDP 450달러(2006년)의 저개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차이가 생기게 된 결정적 요인은 근면·교육열·검약·조직·기강 등 문화적 차이였다는 것이 헌팅턴의 주장이다. 한마디로 문화가 발전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한국은 유례없는 ‘압축성장’의 신화를 이루어 냈다.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하지만 부작용도 많았다. 고속성장의 그늘에 가려 불법과 탈법, 비리와 반칙이 관행처럼 자리 잡았다. 글로벌 경제의 거센 파도 앞에서 그것이 곪아터진 것이 이른바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라는 외환위기였다. 위기는 넘겼지만 과거의 잘못된 관행과 그 잔재를 우리는 아직도 말끔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구린내 안 나는 데가 별로 없다. 바위를 들출 때마다 구더기와 벌레가 꿈틀거린다. 현직 국세청장이 부하 직원으로부터 거액을 받아 구속됐다. 월세처럼 정기적으로 받아 챙긴 것이 거의 상납 수준이다. 윗물이 이럴진대 아랫물이 어떨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세계적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찬사의 한편으로 비자금을 조성하고, ‘떡값’이란 이름으로 각계에 뇌물을 뿌려 국가 시스템을 교란했다는 의혹이 삼성에 쏟아지고 있다. 불법과 비리를 감시하고 처벌해야 할 검찰은 되레 그 의혹의 중심에 있다.

학교 교사가 입시 문제를 몰래 빼돌려 청소년들의 가슴에 대못질을 하는 충격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억대의 돈을 매개로 대학 편입학 흥정이 오가고, 학력을 속여 대학 교수가 되기도 한다. 억지춘향으로 자기 이름을 국가 유공자 명단에 올려 각종 특혜를 누려온 고위 공직자도 있다. 신뢰가 무너진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한국의 1인당 GDP는 아직 세계 29위(2006년 기준)에 불과하다. 일류 선진국권에 진입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구태와 악습과 작별하지 않으면 한국은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없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의 문턱을 확실히 넘어서기 위해서는 문화를 바꿔야 한다.

깨끗한 물보다는 약간은 흐린 물이 물고기 살기엔 더 좋다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더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베풀고 나눠 주는 미풍을 유지하려면 탁자 아래로 은밀히 주고받는 문화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있다. 기계를 돌리려면 기름칠이 필요하다는 논리도 제시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일류 선진국들은 너나없이 우리 사회보다 투명하고 깨끗하다는 점이다. 부정과 부패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왜곡시켜 결국 경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조금은 불편할 수 있고, 인정이 메말라 간다는 불만이 나올 수도 있지만 잘못된 관행을 고치지 못하면 한국은 절대 일류 선진국이 될 수 없다.

대권 주자들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한다. 정말 그럴 생각이라면 문화를 바꿔야 한다. 고도성장기의 밀어붙이기식 개발 공약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은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다. 진정으로 우리 경제를 살려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길은 개발 연대의 음습한 ‘밀실 문화’를 21세기 글로벌 경쟁 시대에 맞는 투명한 ‘광장 문화’로 바꾸는 데서 찾아야 한다. 이번 대선은 문화를 바꾸는 견인차 역할을 할 사람을 뽑는 선거가 돼야 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