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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나이팅게일' 1300명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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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삼성서울병원 본관 14층 1457호. 뇌졸중 환자 김모(77)씨의 침대 머리맡에는 남자 간호사 이정재(28)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 있다. 이씨는 이 병원에서 최초로 일반 병동에서 근무하는 남자 간호사다. 간병인 임성숙(55)씨는 "할머니들이 이 간호사를 손자처럼 생각해 여자 간호사보다 더 좋아한다"며 "콕 찍어서 이 간호사를 불러달라고 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남자 환자의 성기에 소변기를 끼우거나 거구의 환자를 일으켜 세울 때도 이씨를 부르는 환자가 많다.

2005년 3월 이씨가 병동 근무를 시작할 때만 해도 선입견이 많았다. 야간 근무조였던 이씨가 환자 상태를 살피기 위해 밤 늦게 병실을 둘러보고 있을 때 한 할머니 환자가 고함을 질렀다. "왜 남자가 여자 병실에 들어와 얼쩡거리느냐"는 호통이었다. 당시만 해도 남자 간호사가 드물고, 그마저도 주로 수술실이나 정신과병원에 주로 근무했다. 이씨는 "처음에는 청소 용역 직원이나 인턴 의사냐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며 웃었다.

남자 간호사 지망생이 급증하고 있다. 대한간호협회는 13일 간호대에 재학 중인 남학생 수가 10년 새 23배 늘었다고 발표했다. 1996년 87명에서 지난해 2021명으로 급증했다. 간호대 재학생의 5%다. 백찬기 간호협회 팀장은 "현직 간호사 중 남자 비율은 0.6%(1324명)지만 간호대 재학생만 따지면 미국 남자 간호사 비율(5.8%)에 육박한다"고 말했다.

삼성서울병원 이정재(28) 간호사가 13일 오후 뇌졸중센터 병동에서 컴퓨터에 입력된 오전 근무자의 전달 사항을 확인하고 있다. 이 병원의 남자 간호사는 30명이다. 이들은 응급실·중환자실·일반병동·검사실 등에 근무한다. [삼성서울병원 제공]

남자 간호사 지망생이 늘어나는 것은 청년실업 때문이다. 간호대생은 졸업 전 대부분 취업이 확정된다. 간호사가 부족한 데다 자격증까지 있어 일반 직장인에 비해 미래에 대한 불안도 적다.

남자지만 병동에서 하는 일은 여자 간호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환자 약 챙기고, 혈압 재고, 식사를 돕고, 환자 상태를 살피는 것이 주요 업무다. 3교대 근무도 똑같이 돌아간다. 나이 많은 환자나 '간호사 언니'만 생각하던 어린이 환자에겐 '간호사 오빠'가 더 인기있을 때도 있다.

불편한 점도 있다. 병동마다 간호사실 옆에 직원 화장실이 있지만 모두 여성용이다. 이씨는 어쩔 수 없이 남자 환자 화장실을 이용한다. 병동 탈의실도 여성 전용이라 지하 1층 별도의 탈의실을 이용해야 한다. 젊은 여자 환자 일부는 아직 남자 간호사를 꺼린다. 이씨는 "처음에는 환자가 거부하면 당황했지만 지금은 능숙하게 환자를 안심시킨다"며 "간호사가 여성의 직업이란 생각은 편견이고, 자신의 성격이나 적성에 간호 업무가 맞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금남의 벽' 허물기=간호협회에 따르면 1936~62년 간호원 양성소에서 22명의 남자 간호사가 배출됐다. 당시는 여성만 간호사로 인정하는 규정이 있어서 이들은 정식 간호사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최초의 남자 간호사는 62년 간호사가 된 조상문씨로 서울위생간호전문학교장을 지냈다. 이후 매우 드물게 남자 간호사가 나왔지만 벽은 높았다. 100년 전통을 가진 연세대 간호대에서 첫 남자 간호사가 나온 것은 85년이다. 국군간호사관학교는 아직 남자를 받지 않는다. 현역 남자 간호사 중 최고 선임자에 드는 우진하(47) 건국대병원 수술간호팀장은 "남자 간호사는 무조건 수술실이나 응급실 같은 힘든 곳에만 배치돼 역차별 받는 시절도 있었다"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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