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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연장 순례] 샌프란시스코 전쟁 기념 오페라 하우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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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으로 전막(全幕)으로 상연된 오페라는 1851년 아델피 극장 무대에 오른 벨리니의 ‘몽유병의 여인’이다. 흙먼지 투성이의 장화를 신고 권총을 옆에 차고 극장에 나타난 카우보이들은 프리마돈나의 화려한 아리아에 휘파람을 불며 열광했다. 여주인공은 이탈리아어로, 합창단은 영어로 노래를 불렀다. 그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 유명 오페라단들은 미국 순회공연 때 빼놓지 않고 샌프란시코를 방문했다.

1906년 4월 18일 새벽 5시 12분. 강도 7.8의 대지진이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했다. 도심은 온통 불바다로 변했다. 이튿날 한 신문은 이렇게 썼다. “샌프란시스코에 화재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가 불에 탔다.”

팰리스 호텔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단원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순회 공연을 하러온 세계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묵고 있었다. 카루소는 17일 밤 티볼리 가든 시어터에서‘카르멘’(돈 호세 역)에 출연한 뒤 깊이 잠들어 있었다.

카루소는 배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꿈을 꾸었다. 갑자기 뭔가 쿵 하는 강한 충격에 잠이 깼다. 깨어 보니 풍랑을 만난 배처럼 침대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부랴부랴 옷을 챙겨입고 샌프란시스코를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도 테오도어 루드벨트 대통령의 자필 사인이 담긴 사진은 챙겼다. 마차를 얻어 타고 오클랜드로 갔다가 그곳에서 기차로 뉴욕으로 향했다. 절대 다시는 샌프란시스코에 오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그후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카루소의 노래를 영영 들을 수 없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이 가지고 왔던 무대 세트와 의상도 몽땅 불에 타고 말았다. 오페라 극장도 돌무더기로 변해 버렸다.

두 차례의 대지진이 탄생시킨 오페라 극장

샌프란시스코 도심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1911년부터 오페라 극장 신축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샌프란시스코 음악협회가 건축비로 100만 달러를 모금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민간 단체였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시당국이 극장 신축을 위한 부지를 제공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이 계획은 곧 무산됐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18년 몇몇 독지가들이 모여 허물어진 성 이냐시오 성당 자리에 오페라 극장을 지으려고 했다. 현재 데이비스 심포니 홀(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상주 무대) 자리다. 이 계획은 음악협회가 추진했던 것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오페라 극장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념하는 작은 기념 마당과 미술관을 포함하는 프로젝트였다. 추진 위원들은 엄청난 건축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얼마 못가서 계획 자체가 흐지부지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참전용사들의 재정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오페라극장 신축 계획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 사업으로 확대시켰다.

문화적 소양을 갖춘 사회 저명 인사들은 오페라 극장과 미술관을 원했고, 참전용사들은 함께 모여 빙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전혀 이질적인 집단이 동상이몽격으로 모여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1920년 기공식이 끝나고도 6년간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이유는 복잡하다. 매입한 부지가 너무 좁았고, 담보물에 대한 법적 구속력도 없었다. 게다가 리온 내화(耐火) 창고 회사가 길 건너편 부지를 매입해 대규모 창고를 짓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현재 ‘전쟁 기념 오페라 하우스’와 참전용사의 집이 들어선 곳이다. 창고 부지까지 매입하는 등 모든 장애물이 해결되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시청을 본따 단일 건물을 지으려는 계획은 백지화됐다. 참전용사들은 독립 건물을 갖기를 원했다.

참전용사의 집과 쌍둥이 건물

두번째 기공식이 1926년 11월 11일(종전 기념일)에 열렸다. 하지만 본격적인 공사는 5년 후에야 시작됐다. 쌍둥이 빌딩을 짓는 건축비는 단독 건물을 짓는 것보다 훨씬 많이 들었다. 그만큼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 와중에 오페라 극장을 후원하는 사람들과 참전용사들 간에 건물과 부지 확보를 놓고 신경전이 벌어졌다. 결국 쌍둥이 빌딩의 정초식은 1931년 11월 11일에 열렸다.

공사 도중 땅속에 묻힌 호수(미션 베이 크릭)가 발견됐지만 오페라 극장은 이듬해 개관했다. 원래 윌리스 포크, 알버트 랜스버그가 오페라 극장을 설계를 맡고 아서 브라운, 존 베이크웰이 참전용사의 집을 설계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베이크웰은 일찌감치 손을 뗐다. 길 건너 시청사(1915년 준공)를 설계한 아서 브라운이 전쟁 기념관 프로젝트의 수석 건축가를 맡고 샌프란시스코 오르페움 시어터를 설계한 바 있는 랜스버그는 인테리어를 맡았다. 총건축비는 550만 달러.

오페라하우스와 참전용사의 집은 겉모습만 보면 똑같다. 미관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양쪽의 불평을 미리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오페라 애호가나 참전용사 모두가 상대편 건물이 더 멋있고 더 비싸게 지었다고 불평할까봐 아예 똑같은 모양으로 지은 것이다. 오페라 극장은 이름 그대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에게 헌정됐다.

1932년 10월 15일 토요일 저녁 샌프란시스코의 내로라하는 지도층 인사 4000여명이 전쟁기념 오페라 하우스로 모여들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아마존 여전사의 모습이 금빛으로 새겨진 프로세니엄 아래 무대막이 열리면서 푸치니의‘토스카’가 상연됐다. 1923년 미국에서 시립 오페라단으로는 두번째로 출범한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이 출연했다. 가에타노 메롤라가 지휘봉을 잡고 소프라노 클라우디아 무치오가 토스카 역을 맡았다.

샌프란시스코 전쟁 기념 오페라는 미국 최초의 시립 오페라 극장이다. 개관 이튿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전쟁 기념 오페라 하우스는 그 자체가 악기다. 일종의 건축의 바이올린이다”라고 썼다.

미국 최초의 시립 오페라 극장

참전용사의 집은 외관은 오페라 하우스와 똑같다. 하지만 내부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1층은 헙스트 시어터(Herbst Theatre)와 참전용사회 사무국, 2층은 회의실, 3∼4층엔 1994년까지만 해도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이 있었다. 헙스트 시어터는 1945년 유엔헌장과 세계인권선언문 조인식이 열린 곳이다.

샌프란스코 심포니(1911년 창단)는 1980년 옆 블럭에 개관한 데이비스 심포니 홀로 보금자리를 옮기기 전까지는 이곳 전쟁 기념 오페라 하우스에서 연주했다. 1933년부터는 샌프란시스코 발레단까지 가세했다. 연중 무휴로 공연이 열리다 보니 개ㆍ보수 공사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89년 월드 시리즈 야구 경기 개막 직전 샌프란시스코에 강도 7.1의 지진이 발생했다. 시민들은 엄청난 슬픔에 빠졌지만, 전쟁 기념 오페라 하우스로서는 하늘이 내린 절호의 기회였다. 부서진 건물 일부를 보수하면서 무대 시설도 최신 설비로 바꿨다. 무려 8050만 달러의 예산이 투입됐다. 1996∼97년 개ㆍ보수 공사로 아예 극장 문을 닫았다. 객석 의자 커버도 교체했다. 1년 6개월간의 공사를 끝내고 1997년 9월에 재개관했다.

영화‘프리티 우먼’(1990년)에서 리처드 기어는 LA에서 자신의 전용 비행기에 줄리어 로버츠를 태우고 오페라 공연 시간에 늦지 않게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바로 전쟁 기념 오페라 하우스다.

전쟁 기념 오페라 하우스는 인근의 참전용사의 집, 데이비스 심포니 홀, 아시아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갤러리, 샌프란시스코 공립 도서관, 시청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시빅 센터’, 참전용사의 집, 심포니홀, 헙스트 시어터 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전쟁 기념 아트센터’(SFWMPAC)로 부르기도 한다.

◆공식 명칭: War Memorial Opera House

◆개관: 1932년 10월 15일

◆홈페이지: www.sfwmpac.org

◆객석수: 3176석(입석 300석 포함)

◆건축가: 아서 브라운, 앨버트 랜스버그, 윌리스 포크

◆주소: 301 Van Ness, San Francisco

◆교통 : MUNI Metro-전차 F선 Van Ness Avenue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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