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비서실>193.全敬煥씨공천좌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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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88년 6共 출범과 함께 시작된 5共 차별화,특히 공천과정에서 확인된 5共 인물 잘라내기를 지켜봐야했던 5共의 주인 전두환(全斗煥)前대통령의 심경은 어떠했는가.
당시 날로 더해가는 권력갈등속에서 6共의 「5共 창구」라는 곤혹스런 채널을 맡을 수 있었던 사람은 5.6共,즉 전두환.노태우(盧泰愚)두 사람을 모두 잘 알아야 했기에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그 대표적인 채널이 全.盧 모두의 오 랜 친구인 이원조(李源祚)씨,그리고 盧대통령의 고교 동창이자 全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었던 김윤환(金潤煥)씨였다.
李씨는 전국구로 金씨는 지역구로 각각 13대 국회에 진출해 있었다. 두 사람중 金의원의 기억(李씨는 지난해 전국구의원직을사퇴하고 출국한 뒤 미국등지에서 지병인 당뇨병을 치료.요양하면서 칩거중이다).
金당시 정무장관은 공천발표 직전 청와대의 부름을 받았다.盧대통령은 그에게 최종 공천명단을 내놓았다.金장관이 이미 탈락사실을 알고있던 권정달(權正達)의원은 물론이고 권익현(權翊鉉)의원도 빠져있었다.盧대통령은『두사람 모두 탈락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을 全前대통령에게 잘 설명해 달라』고 당부했다.
연희동 全前대통령의 사저를 찾은 金장관은 兩權탈락 사실을 통보했다.全前대통령은 예상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그렇지만 그도권익현의원 대목에서는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던 듯『그런데 권익현이까지 탈락시켜야 되나』라고 물었다.
金의원은『그 질문에 대답하는데 꽤 애먹었다』고 기억했다.한마디로 설명되는 분명한 이유가 마땅치 않았다는 얘기다.어쨌든 全前대통령은 별다른 이의제기 없이 통보내용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全前대통령의 적극적인 성격이나 「盧정권은 내가 만들었다」는 자부심으로 미루어볼 때 이같은 반응은 다소 의외였다.全前대통령으로서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全대통령은 이미 盧후보가당선된 얼마후 공천권의 양여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
이같은 약속에 따른 어쩔수 없는 수긍이었지 내심 섭섭함이 없을 수는 없었다.가슴 속에 묻힌 全前대통령의 내심은 동생 전경환(全敬煥)前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회장의 공천포기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全대통령이 13대 총선에서 가장 공천 하고 싶어했던 사람이 바로 동생이었으며,이는 또 全대통령이 대통령자리에서물러나는 순간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일이기도 하다.
全前대통령이 입버릇처럼 「업어키웠다」고 말할 정도로 애정을 표시해온 동생 전경환씨는 일찍부터 정치에 참여하고 싶어했다.그는 87년3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회장직을 물러나면서 가진 한인터뷰에서 스스로『10.26 직후 시골(고향은 경남합천)에 내려가 국회의원에 한번 출마해 볼까도 생각했었습니다만 본인이 국회에 나가면 틀림없이 여러 측면에서 비난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그같은 점은 각하께도 결코 득이 될리가 없다는 생각에서…』라는 말로「정치입문에의 오랜 소망」 을 밝힌 적도 있었다.
다만 그는 5共 기간중「각하에게 누를 끼칠까봐」이같은 소망을자제해온 것이다.그러니 5共이 끝나고 6共과 함께 시작되는 13대 총선에서 그가 자제해온 정치에의 꿈을 펼쳐보고 싶어했던 것은 당연했다.全대통령 역시 오랜 동생의 소망을 억제해온데 대한 미안함에서인지 동생의 13대 총선출마를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6共 주도세력의 전혀 다른 생각이었다.
6共 관계자 X씨는『한마디로「말도 안된다」는 분위기였죠.청와대 경호원이던 인물이 형 덕분에 벼락출세했다고 국회의원까지 하려한다는게 말이나 되느냐는 자격시비부터 나왔죠.더구나 全회장이5共 기간중 저지른 새마을비리 때문에 6共쪽에서 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잖아요.이미 6共쪽에서는 문제가 터질 경우 全회장이 1차적인 처리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까지 형성돼 있던 판이었으니까 공천이란 꿈도 꿀수 없는 일이었죠』라고 말했다.
X씨는 이어『그런 분위기인데도 全대통령이 출마를 승낙했다고 하니까 누가 全대통령의 의사를 번복시킬 것인가가 고민이었습니다.여러가지 간접적인 방법으로 6共쪽의 거부의사를 전했지만 구체적으로 누구도 나서서 총대를 메기 힘든 상황이었죠 』라고 당시6共 핵심들의 고뇌를 설명했다.
***黨 누가 만들었나 역시 총대메기,특히 全대통령 목에 방울달기의 명수는 김용갑(金容甲)前총무처장관이었다.
全대통령이 현직을 물러나기 직전인 88년 2월말 어느날.이미총선시기를 둘러싼 줄다리기가 盧당선자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무렵으로 全대통령은 동생의 출마에 대한 盧당선자쪽의 반대의견도듣고 있었다.
全대통령은 김윤환비서실장과 김용갑민정수석에게『아침이나 같이 하자』며 불렀다.金수석이 오전8시 조금 안돼 먼저 도착했다.全대통령은 겨울이라 아직 어둑어둑한데도 집무실에 불도 켜지않은채앉아 있다가 金수석이 들어서자 굳은 표정으로 엉 뚱한 질문을 던졌다. 『이봐 민정수석.민정당 누가 만들었나.』 金수석은 무슨 뜻에서 묻는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내가 만들었지.』全대통령은 자문자답했다.
『예 그렇습니다.』金수석은 긴장했다.
『그런데 국회의원이 전부 몇명이야.』全대통령의 질문은 계속됐다. 『대략 3백명쯤 될 겁니다.』金수석은 설명을 덧붙이려 했다. 그러나 全대통령은 金수석의 말을 자르면서 단호하게 물었다. 『이봐,국회의원 3백명중에 1명쯤은 내가 마음대로 시켜도 되는 것 아니야.』 金수석은 그때서야 비로소 全대통령이 동생 공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출마반대의 논리를 머리속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全대통령의 말이 이어졌다.
『난 그동안 민정수석 얘기 다 들어줬어.이번에도 마찬가지야.
확실히 얘기해봐.경환이가 정치를 하고 싶어하는데 이번에 합천에공천해도 되는 것 아냐.』 金수석은 全대통령의 불쾌해 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하지만 노태우대통령만들기의 공신으로 6共측의 곤혹스런 사정을 알고있는 그로서는 분명히 반대해야 했다.
『안됩니다.시중여론이 좋지 않습니다.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회장 당시 문제와 관련해 말이 많습니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실내에서도 全대통령의 얼굴이 흙빛으로 굳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全대통령은『그래 좋다.출마 안시키겠다』라고 말했다.그리고 한마디 외쳤다.
『그런데 너희들 나한테 이럴 수 있는 거야.』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全대통령이 분명「너」가 아니라「너희들」이라는 말로 여러명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쏟아놓았다는 것이다.「너희들」에는 6共 창업공신들은 물론 노태우당선자까지 포함됐다는 것을 느낌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이 렇게 공천과 관련된 全대통령의 섭섭함은 이미 일찍부터 쌓이기 시작했지만 감춰져 있었을 뿐이었다.
뒤늦게 金비서실장이 도착했으며,金실장과 金수석은 그날 아침식사에 초대받고는 아침식사 대신 全대통령의 꾸중만 잔뜩 들어야 했다. 이렇게 全대통령은 한바탕 분통을 터뜨리고는 동생의 공천을 포기했다.물론 고향 합천을,代를 이을 정치구상을 아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14대 총선에서도 전경환씨는 출마하지못했다.그는 이미 5共비리의 대표격으로 구속돼 7년형 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가석방된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장남 출마說 여전 대신 全前대통령의 장남인 재국(宰國)씨의 출마설이 나돌았다.全씨는 당시『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주위의 권고등에 출마를 심각하게 고려했었다.그래서 일부 출마희망자들은 그를 찾아와 출마포기 또는 공천양보를 하소연하기도 했다.그러나 그 역시 출마하지 않았다.덕분에 全前대통령이『지역구 합천을 위탁한다』는 의미에서 13대 공천을 맡겨줘 당선됐던 권해옥(權海玉)의원이「현역」의 기득권을 인정받아 다시 14대 공천을 받을 수 있었다.權의원은 재국씨의 출마가 점쳐지던 무렵 내무부장관 초청으로 동료의원들과 같이 골프를 치러갔다가 홀인원(한번만에 골프공을 구멍에 넣어버리는 진기록)의 행운을 기록했는데,바로 얼마뒤 全씨의 출마포기소식을 들어『홀인원의 행운으로재선됐다』는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아직 全前대통령의「정치가업잇기」생각은 여전하며,이에 따라 재국씨의 차기 총선 출마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정작 재국씨는아버지에 기댄 입신보다는 혼자 일궈내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출판사(시공출판사)일에『일단 승부를 걸겠다』는 유보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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