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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기자의 웰컴 투 풋 볼 <24> 술이 먼저냐, 축구가 먼저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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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개인 시간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밤은 내 친구다. 놀러 나가지 않으면 골도 못 넣는다.”(브라질 골잡이 호마리우, 1997년 스페인 발렌시아 소속 당시 감독이 나이트클럽에 못 가게 하자)

“나는 몇 차례 펠레를 수행하는 영광을 얻었다. 술 잘 마시는 세계 베스트11을 뽑는다면 그는 당연히 등번호 10번을 달 것이다.”(전 잉글랜드 국가대표 앨런 허드슨)

축구 선수와 술에 얽힌 어록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개를 뽑아 봤다. 이 주제로만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술과 축구는 오랜 기간 동거해 왔다.

“선수가 술 마시는 것은 절대 반대다. 술 안 마시는 선수만 갖고 팀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99년에 한 말이다. 그런데 그가 70년대 중반 자신의 이름을 딴 퍼기스(Fergie’s)라는 술집을 운영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퍼거슨은 현역 은퇴를 한 뒤 이스트 스털링샤이어 감독을 맡고 있을 때 자신의 고향인 글래스고 고반에 술집을 냈다. 이 집이 잘 굴러가자 친구와 동업을 해 쇼스(Shaws)라는 술집을 하나 더 내기도 했다.

그랬던 퍼거슨이 86년 맨U에 취임하면서 가장 먼저 내건 게 ‘음주와의 전쟁’이었다. 그는 술이 오랜 기간 맨U 선수들의 기강과 건강을 동시에 해치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술과 축구 선수와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했다.

‘축구 선수들이 술을 즐기는 것은 우리 이전 세대의 노동자 계층에서 내려온 음주문화 때문이 아닌가 싶다. 프로축구 초창기 선수들은 대부분 자신의 장래를 늘 염려하면서 가족을 부양한 가장이었다. 공장이나 탄광에서 힘든 교대 근무를 하는 직업이라면 일이 끝난 뒤 맥주 한 잔 즐길 자격이 충분하다. 그런데 축구 선수들이 이러한 노동자 계층의 음주 관행을 자연스레 답습하게 된 것 같다.’

퍼거슨은 수차례 경고했음에도 술을 마시고 말썽을 피운 브라이언 롭슨 등 세 선수를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팀에서 내보냈다.

7월 아시안컵 대회 중에 숙소를 이탈해 술집에 갔던 이운재 등 대표팀 고참 4명이 징계를 받았다. 이들이 프로선수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국가대표로 다시 뽑히기는 어렵게 됐다. 당시 대표팀 코치였던 홍명보 올림픽팀 코치는 이들을 두둔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수들이 대회에 나가면 육체적·정신적으로 고통을 많이 받는다. 일 끝나고 뒤풀이를 하는 것쯤으로 봐 줬으면 하는 면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탄광 근로자에게 해당되는 말이지, 육체적·정신적으로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축구 국가대표 선수에게 적용될 것은 아니다.

인간이 술을 빚어 마시기 시작한 것과 둥근 물체를 발로 차면서 놀기 시작한 것 중 어느 게 먼저인지는 모른다. 다만 직업으로 축구를 하는 사람은 술을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정영재 기자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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