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범죄 프리즘] 꼬리 잡기 힘든 뇌물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4호 13면

최근 유행하는 인기 사극의 한 장면. “판내시부사의 내자가 하례품을 들고 네 처소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벌써 뇌물을 받아 치부하는 것이더냐?” 윤숙의에 대한 인수대비의 서슬 퍼런 추궁이 이어진다. 사극뿐만이 아니다. 고위 공직자의 뇌물수수 의혹에 관련된 기사가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정책결정권을 갖는 고위 공직자가 뇌물을 받으면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할 수 없고, 국민의 신뢰도 저버리게 되므로 뇌물죄는 엄하게 처벌해야 마땅하다.

일선에서 수사를 해보면 뇌물죄는 다른 범죄와 구별되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먼저, 뇌물을 주고받는 자들이 완전 범죄를 꿈꾸는 것이다. 뇌물범죄는 당사자 이외에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참고인이 거의 없는 이유다.

또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뇌물은 거의 현금으로, 그것도 헌 돈으로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 거액을 주고받을 때는 수표나 양도성예금증서가 편리하지만 꼬리가 길어지게 된다. 사과상자나 골프백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전달한 뇌물의 출처와 사용처를 확인할 수 없도록 갖가지 자금세탁 기법도 동원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뇌물죄를 적발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공여자와 수뢰자 사이에 갈등이 생기지 않는 한 뇌물을 건넨 사실을 수사기관에 순순히 털어놓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특히 수뢰자는 공여자의 재산상 이익을 좌우하거나 인사조치할 권한을 갖는 등 우월한 지위를 갖기 때문에 공여자는 뇌물공여 사실을 털어놓기를 두려워한다.

여기에 자신을 도와준 수뢰자와의 인간관계도 있다. 더욱이 진실을 털어놓는 순간에는 뇌물공여죄의 형사책임까지 져야 한다. 그러니 침묵하기로 결심한 공여자의 마음을 움직여 진술을 받아내기란 정말 어렵다.

설혹 어렵사리 공여자를 설득하더라도 장래를 잘 대비한 탓(?)에 뇌물죄의 증거로는 공여자의 진술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유일한 증거가 공여자의 진술뿐이니 법원도 뇌물죄의 증거심리를 엄격하게 하는 편이다. 뇌물죄를 유죄로 인정하려면 법원은 공여자 진술의 신빙성, 진술내용의 합리성, 객관적 상당성, 일관성뿐만 아니라 공여진술로 공여자가 얻는 이해관계의 유무까지 살펴야 한다(대법원 2002. 6. 11.선고 2000도 5701 판결 등).

그뿐만이 아니다. 공여자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경우에는 무죄판결을 받고 싶은 수뢰자가 공판과정 내내 공여자에게 진술을 번복하도록 사주한다. 공여자가 수사 과정에서의 진술을 바꿔 무죄가 선고된 뇌물사건이 부지기수다. 그러니 공여자가 뇌물을 주었다는 진술은 수사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뇌물을 받고도 법망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고위 공직자들이 많아질수록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피고인의 인권보호도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사명이지만, 뇌물죄의 이런 특성도 형사재판 과정에서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뇌물죄나 마약처럼 증거확보가 어려운 범죄를 단죄하기 위해서는 범행을 자백하는 조건으로 범인의 형량을 낮춰주는 유죄협상제도나 참고인이 제3자의 범행을 증언하면 참고인의 죄를 감면해주는 면책조건부 증언취득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법과 원칙보다는 학연·혈연·지연을 이용한 청탁을 통해 은밀히 일을 해결하려는 의식을 바꿔 뇌물이 오가는 환경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것이 최선의 단속책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