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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금 '블랙 리스트'에 기업들 떨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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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 12면

‘포커스 리스트(Focus list)’는 올 6월에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역시나 미국 경영자들은 바싹 움츠렸다. 캘리포니아의 공무원 연금인 캘퍼스(CalPERs)가 해마다 발표하는 이 ‘블랙 리스트’에 들었다간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 올해엔 제약사 엘리릴리와 정보기술(IT)업체 EMC 등이 오명을 입었다.

美캘리포니아 공무원 연금의 낙제 기업 명단, 디즈니 회장도 쫓아내

리스트엔 사장이 제대로 경영을 못했거나, 나쁜 지배구조로 주주에게 손해를 끼친 5~10개의 기업 이름이 올라간다. 연기금으로부터 의결권 행사·주주 제안 등의 공격을 받는 동시에 주가하락까지 각오해야 하니 기업이 잔뜩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제록스·월트디즈니 같은 이름난 기업들도 망신을 당했다. 디즈니의 군주였던 마이클 아이스너 회장은 2004년 캘퍼스의 퇴진운동으로 아예 물러나는 수모를 당했다.

이처럼 캘퍼스는 펀드자본주의의 ‘전위부대’로 떠오른 연기금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연기금 입김이 센 이유는 워낙 ‘큰손’이기 때문이다. 캘퍼스만 해도 자산이 한국의 내년 나라살림(257조원)에 버금가는 220조원에 이른다.

본디 연금은 수십 년 뒤 가입자에게 약속한 돈을 돌려줘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따라서 맘대로 자산을 굴릴 수 없고 주로 채권 같은 안전한 상품에 돈을 묻어뒀다. 그런데 연기금이 주주권익 보호에 눈을 뜨면서 자본주의도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1931년에 설립된 뒤 조용히 지내던 캘퍼스가 그 도화선에 불을 질렀다.

85년 텍사코라는 회사가 그린메일(주식매집 뒤 인수합병하겠다고 위협하며 비싸게 되사달라고 요구하는 것) 위협에 직면해 주식을 비싸게 사주자 ‘다른 주주들이 소외당했다’며 캘퍼스를 중심으로 기관투자가협회(CII)가 조직돼 ‘입김 강화’에 나선 것이다.

다른 나라도 상황은 비슷하다. 영국은 2000년 모든 퇴직연금에 대해 사회책임·환경·지배구조(ESG) 원칙을 따지도록 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일본의 후생연금도 99년부터 사외이사 선임과 적자업체의 임원연임 거부 등과 같은 규정을 만들어 적극적 의결권을 행사한다”고 밝혔다.

연기금은 이제 ‘연합군’까지 만들고 있다. 지난해 4월 뉴욕 증권거래소에선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까지 불러놓고 미 캘퍼스·네덜란드 공무원연금(ABP)·영국대학교원연금(USS) 등이 사회책임투자 원칙을 발표했다. 그들은 앞으로 투자할 때 재무적 성과뿐 아니라 환경·사회책임·지배구조(ESG) 문제까지 보기로 했다. 이에 동참한 펀드는 당초 60여 개에서 현재 190여 개로 늘어 보유자산만도 8000조원이 됐다. 세계 300대 연금의 총자산은 지난해 11% 늘어나 사상 처음으로 10조 달러(약 9000조원)를 돌파했다.

한국도 이런 글로벌 흐름에 잰걸음으로 편입되고 있다. 88년 등장한 국민연금은 꾸준히 성장해 지난 4월 자산이 200조원을 돌파했다(현재 213조원). 국가별 국민연금 중에선 일본ㆍ노르웨이ㆍ네덜란드에 이어 세계 4위의 공룡으로 컸다.

증시에서도 이미 ‘큰손’ 대접을 받는다. 국민연금의 주식투자가 전체 증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0.8%에서 현재 3.4%까지 상승했다. 국민연금이 지분을 5% 이상 보유한 회사만도 대한항공(6.5%)·호텔신라(6.6%)·LG화학(5.7%) 등 79개에 이른다. 영향력 보폭도 슬슬 넓히고 있다. 지난해 3월엔 미국의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이 KT&G를 공격했을 때 KT&G 편을 들어줘 든든한 원군 역할을 했던 사례도 있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는 데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지난해 3월에야 ‘주식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를 출범시킨 뒤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국에선 각종 공제회도 ‘큰손’대열에 들었다. 교직원 공제회(자산 규모 32조원)는 채권 일색이던 포트폴리오를 2004년부터 전격 교체, 당시 10% 대였던 주식투자 비중을 현재 60%로 높였다. 군인공제회(자산 7조원)도 대우채·카드채 사태를 겪으면서 채권 비중을 줄이고 기업 인수 등 다른 수익원을 찾아 나섰다.

특히 이들 기금은 인수합병(M&A) 시장에서 맹위를 떨쳤다. 진로·금호타이어·대우종합기계·뉴코아 등 2001년 이후 매물로 나온 대기업 인수전에서 양대 공제회 이름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들은 론스타ㆍ뉴브리지캐피털 등 외국계 펀드가 주도하던 M&A 게임에서 당당한 ‘토종 주자’로 성장했다.

미국에선 대학 기금도 힘을 쓰고 있다. 32조원의 자산을 굴리는 하버드대는 최근 1년간 23%의 고수익을 올렸다고 발표해 월가를 놀라게 했다. 예일대 기금도 10년간 40억 달러에서 150억 달러로 세 배가량 불어 시장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마침 국내에서도 교육인적자원부가 11월부터 대학들이 주식투자를 하도록 규제를 풀었다. 증권업협회에 따르면 발전기금ㆍ수익용기본재산 등 투자 가능 재원은 6조5000억원가량이다.

필연적인 고령화 사회의 대두로 앞으로도 연기금의 덩치와 역할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연기금은 ‘실탄’이 부족한 증시의 든든한 자금줄이기도 하다. 2009년부터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되면 연기금 주식투자는 더욱 불붙을 전망이다. 한국증권연구원 진익 연구위원은 “자본시장통합법으로 연기금의 특수한 목적에 부합하게 설계된 파생상품 계약을 거래하거나 간접투자기구를 설립하는 일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기금의 공룡화에 대한 경계감, 고수익·위험자산에 대한 투자 확대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실제로 네덜란드는 지난 4월 연금펀드의 부동산ㆍ위험자산 투자 비중을 줄이는 규제안을 놓고 의회가 청문회를 열자, ABP 같은 대형 연금펀드가 반발하는 사태를 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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