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할말은하자>23.아쉬운 시민의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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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택시운전사 金모씨(34.서울노원구공릉동)는 올 1월 지하철 1호선에서 당했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분통이 치민다.
중.고교생인듯한 10대청소년 10여명이 열차안에 신문지를 깔고 괴성을 지르고 노래를 부르며 담배까지 피워댔지만 전동차안에있던 1백여명이 넘는 승객들 모두가 잠자코 있었다.
참다못한 金씨는『조용히 하라』고 나섰다가 10대들로부터 멱살을 잡혔고 몇정거장을 지나는동안 계속 이리 떼밀리고 저리 받히며 구타당했다.그러나 金씨를 더 기막히고 화나게 한건 나이어린비행 청소년들에게 맞았다는 사실이 아니다.
『제가 아이들로부터 수모를 당한 것이 20분 가까이 됐고 그동안 수백명의 승객이 열차에서 내렸는데 그중 단 한사람도 역무원이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게 어이가 없습니다.
단 한명만 신고해줬더라도 그런 꼴을 계속 당하진 않았을텐데….뭐하러 중뿔나게 나서느냐는 표정으로 무관심하게 바라보던 눈빛이 생각납니다.저도 이제 아무리 남이 어려운 일에 빠져도 다시는 나서지 않을겁니다.』金씨의 말이다.
우리사회에서 건강한 시민 한사람이 또 사라진 셈이다.
남의 일에만 그런게 아니다.심지어 자신이 피해를 당했어도 한사코 신고하지 않으려는게 요즘의 세태다.
지난달 4일 서울중부경찰서에는 고급차를 몰고다니며 상습적으로여대생등을 유혹해 성폭행과 금품갈취를 일삼은 20대 2명이 구속됐다. 범인중 1명은 명문 Y대 재학생이었고 여자들에게「수련의」라고 속인뒤 야산으로 끌고가 돈을 빼앗고 성폭행을 일삼았다.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범인들이 갖고있던 피해자 수십명의 전화번호를 확보,일일이 찾아가 피해사실을 진술해줄 것을 부탁했지만대부분『그런 사실 없으니 귀찮게 굴지말라』는 답변을 듣고 진술확보에 실패해 골치를 썩여야 했다.
『수치스런 일을 신고 안한것까지는 이해하지만 범인을 붙잡았고보복위협도 없는데 피해사실에 대해서도 입을 다무니….여성들의 그런「무조건 기피」태도는 성범죄 근절에 가장 큰 장애가 됩니다.』 중부경찰서 李石宰형사과장의 말이다.
여성들만이 그런게 아니다.
〈洪炳基기자〉 올 7월말 검찰에 붙잡힌 조직폭력배 상계파는 88년부터 무려 6년이 넘게 상계동 재개발 지역의 공사판마다 쫓아다니며 폭력을 일삼아왔다.
이들이 6년씩이나「법보다 주먹이 가깝게」살수 있었던 이유는 어느 누구도 피해사실을 신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명의 사상자가 나고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어도 주변을 지나는 차량과 행인들은 구호활동은커녕 멀뚱멀뚱 구경만 하는걸 흔히 목격한다.
전국 3만2천5백가구를 대상으로 91년 통계청이 조사한 바에따르면 1년동안 절도.강도를 당했다는 응답이 전체 가구의 11.3%나 됐지만 이중 81%가 아예 신고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다. 택시들마다 교통불편 신고엽서가 마련돼 있지만 당당하게 그걸 사용해본 시민은 모래밭에서 바늘찾기일 것이다.명절.휴가때마다 고속도로에서 갓길운행을 하는 얌체차량들이 줄을 잇지만 차번호를 적어 신고하는「귀찮은 신고정신」을 발휘하는 시민 은 거의없다.그저 한바탕 욕설을 퍼부을 뿐이다.
물론 시민들도 할말은 많다.자발적인 신고를 뒷받침해주는 각종제도적 보완이 안돼있는 것도 사실이다.앙심을 품은 범인들의 보복도 두렵고 잦은 소환이나 출석등으로 일상생활의 리듬이 깨지는것도 싫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용기,어쩔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불편을 외면한다면 건강한 시민사회는 도저히 이룰수가 없다.『큰 사고가나니까 주변 차들이 일제히 멈춰서더군요.응급처치를 하고 양복을벗어 부상자를 덮어주고,카폰으로 병원과 경찰에 신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버스운전사 한명은 경찰관에게 자기가 사고를 전부 목격했으니 나중에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명함을 주더군요.그렇게 서로 협조해 그 큰 사고가 금방 정리되는걸 보며 시민의식이란게뭔지를 비로소 느꼈어요.』 영국런던에 사는 교포 朴모씨(38.
여)의 말을 우리도 이제 되새겨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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