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250년 전 이중환 좇아 발로 쓴 내 나라 내 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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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전에서 최장기 베스트셀러를 뽑는다면, 더 나아가 인용 빈도수가 가장 높은 고전을 꼽는다면?

이중환의 '택리지'가 이들 책의 반열에서 어찌 빠질 수 있으랴. '택리지'는 당대 18세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인문지리서로서, 각계 각층의 사람들에게 폭넓은 관심을 모은 대중 교양서로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지금도 여전히 '종합백과전서'격의 정보와 지식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그 책의 21세기 버전이 우리 눈앞에 출현했다. '신정일'이란 이름이 붙은 책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번에도 '무식한 방법론'으로 무장하고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무식한 방법론'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그의 저술 태도에서 일관된 방법론이 '철저히 걷는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다시 쓰는 택리지'의 묘체는 이들 걷기의 문화적 열정이 빚어낸 '몸으로 쓴 책'이라는 점이다.

지난 20세기 1백여년 간 국토와 민족의 삶은 처참하리만큼 변화를 강요받고 굴절되어 원형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그의 표현대로 '택리지' 같은 책은 50년에 한번, 즉 1백년에 두어번은 뉴버전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이중환과 신정일은 역사.지리.민속.생태학자로서 서로 닮은꼴이며 2백50년의 간격을 넘어 대화하고 있는 중이다.

철도와 고속도로, 다리와 터널, 항구와 도시 등으로 무장하고 철저히 계획된, 그런데도 계획은커녕 난장판에 가까운 무질서로 이루어진 이 번잡한 국토의 몸뚱아리에서 저자는 '택리지'의 저자가 고민하였듯이 '살기 좋은 땅'을 갈구하고 있다. 이 책은 그가 전주에서 황토현 '문화게릴라' 집단을 이끌면서 국토를 누벼온 지난 25년의 이 땅과 사람에 대한 희망의 연대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발과 머리.가슴으로 쓴 현대판 택리지다. 동시에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증언이다.

잠시, 우리는 저자의 약력, 좀더 직설적으로 말해 그의 학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술 동네에서도 학력은 매우 중요하며 '우매한 독자들'은 줄지어 선 우아한 이력서에 일차적 신뢰감을 준다. 그의 학력은 보잘 것 없다. 그러한 풍토에서 그는 김지하의 평가대로 '발로 쓰는 민족 민중사상가'로 불릴 만하다. 그러나 학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으면서도, '탁상물림연구'에 머무르는 학계의 풍토에 그 '고단한' 걷기 방법론과 최소한의 학력으로 '한방' 먹이고 있는 중이다. 우리 시대에 신정일 같은 방식으로 그늘진 한 구석을 채우고 있는 동시대인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다시 쓰는 택리지' 같은 고전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은 도처에서 벌어져야 한다. 서구 편향의 지독스러운 문화사대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는 우리 풍토에서 고전의 법고창신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다. 신정일판 '택리지'를 통해 우리는 전통이 어떻게 다시금 되살아날 수 있는가를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주강현 <한국민속연구소장>

*** 바로잡습니다

2월 7일자 '행복한 책읽기' 섹션 B3면 '다시 쓰는 택리지' 서평의 사진 설명 중 성산 일출봉의 소재지는 북제주군 성산면이 아니라 남제주군 성산읍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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