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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25일 열린 ‘현대중공업 지급보증’ 항소심 재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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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 18면

이익치 전 회장(左), 정몽준 의원(右) [신동연 기자]

25일 오후 5시 서울 서초동의 서울중앙지법 424호 법정. 현대중공업 지급보증 사건으로 기소된 이익치(63) 전 현대증권 회장의 항소심 속행 공판이 열렸다. 이 재판은 정몽준(56) 의원의 증인 소환 여부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러나 이날도 정몽준 의원은 국정감사를 이유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재판이 끝난 뒤 이 전 회장은 “오늘이 벌써 네 번째 불출석”이라며 “현대그룹에서 30년 넘게 일만 한 전문경영인을 오너인 정 의원이 사주해 퇴직한 뒤까지 괴롭히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이익치·정몽준 27년 악연 ‘엑셀차 舌戰’서 시작됐다

이 전 회장은 1997년 6월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가 현대투신 주식을 팔아 캐나다계 은행인 CIBC로부터 외자를 유치할 당시 현대증권 대표이사 명의의 지급보증 각서를 써준 혐의로 기소됐다. 이 전 회장이 “현대중공업에 손해가 생기면 현대증권 등이 책임진다”는 내용의 각서를 현대중공업에 써준 것을 문제 삼았다. 이 전 회장은 1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으며 현재는 서울중앙지법 항소5부 심리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한편 현대증권의 주선으로 현대중공업이 이 거래에 지급보증을 섰는데, 3년 뒤 2460억원의 손해를 본 현대중공업이 이 전 회장을 포함해 현대증권·현대전자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내기도 했다.

이 전 회장은 정 의원을 증인으로 나와줄 것을 요청하는 이유에 대해 “당시 계열사 간 지급보증은 그룹 종합기획실의 고유 역할로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 부자가 최종 결정한 일”이라며 “이미 세상을 떠난 정주영·정몽헌 회장을 빼고 정 의원만이 내 무죄를 증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 증인 출석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전 회장은 왜 이렇게 정 의원을 압박하는 것일까. 현대그룹의 전문경영인과 오너의 보기 드문 갈등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정 의원은 왜 재판장에 나오기를 꺼리는 걸까. 두 사람의 질긴 악연을 깊이 이해하려면 시계추를 27년 전으로 돌려야 한다.
 
■자존심 건드린 ‘엑셀차 舌戰’

80년 초 정주영 명예회장이 이 전 회장을 호출했다. 당시 이 전 회장은 현대중공업 자회사인 현대엔진공업 상무로 있었다. 정 의원은 현대중공업 전무였다. 정 명예회장은 두 사람을 데리고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본관으로 향했다. 회의실로 들어가자 현대차 임원 40여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엑셀 생산 전략회의’였다.

이 전 회장은 대표적인 ‘현대맨’. 69년 현대에 입사해 바로 정 명예회장의 비서가 됐다. 이런 경력 때문에 생전의 정 명예회장은 이 전 회장을 항상 “이 비서”라고 불렀다. 현대증권 대표이사를 역임한 그는 2000년 형제간 경영권 싸움인 이른바 ‘왕자의 난’ 주범으로 몰려 사표를 냈다. 정 의원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6남으로서 현대중공업 회장을 거친 뒤 현재는 대주주로 있다.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의 골이 파이기 시작한 것은 흥미롭게도 전두환 정권 초기 이슈가 된 ‘비교우위론’ 논쟁이었다.

당시 현대차는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비교우위론’을 내세워 완성차보다 부품업체 육성에 주력해야 한다는 산업 구조조정론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던 것. 고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의 의지가 반영된 정책이다. 김 수석은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GM)가 월드카 전략으로 30억 달러를 투입(연산 30만 대)해 공장을 지었는데 우리나라가 어떻게 따라가겠느냐”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유종렬 청와대 산업비서관(전 기아자동차 법정관리인)은 김 수석과는 반대 의견이었다. 그는 비밀리에 정 명예회장에게 현대차를 존속시켜야 할 논리를 담은 보고서를 만들도록 했다. 현대차 이수일 전무가 팀장이 돼 대응방안을 만들었는데 “고유 모델을 개발하되, GM의 10분의 1 수준인 3억 달러를 투자해 30만 대 생산 공장을 짓겠다”는 게 핵심이었다(당시는 포니도 겨우 1만5000대를 팔 때였다). 정 명예회장은 보고를 받은 뒤 “내일 당장 공장을 지어 2년 내에 생산하라”고 지시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정 의원이 정 명예회장에게 말을 꺼냈다. “우리가 어떻게 GM과 경쟁을 합니까. 현대차는 이제 걸음마를 하고 있는데요.”

순간 정 명예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이 전 회장의 의견을 물었다. 바로 정 명예회장이 ‘기다리던’ 대답이 돌아온다. “경부고속도로, 중동 건설 등 모든 게 다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우리는 해냈습니다. 그런 정신으로 자동차도 만들면 됩니다.”

정 의원이 다시 말하려 했지만 정 명예회장은 “넌 모르면 가만히 있어. 이 비서에게 좀 배워라”며 가로막았다. 정 의원의 얼굴이 상기됐다. 이 대목에서 이 전 회장도 “당시 정 의원의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노조 파업 놓고 “조용하게” vs “강경대응”

87년 민주화 욕구가 분출하면서 현대중공업 노조가 파업을 단행했다. 현대중공업 서울지소장 겸 영업본부장으로 있던 이 전 회장은 회사의 임시대변인을 맡아 대(對)언론 창구가 됐다.

이번에 두 사람은 노조관(觀)에서 엇박자를 드러냈다. 대표이사 회장이던 정 의원은 문제를 조용하게 해결하자는 온건론 쪽이었다. 그러나 이 전 회장은 “지금의 노조는 좌파 폭력집단이니 원칙대로 대응하자”는 강경파였다. 그는 내 생각이 아니라 정 명예회장이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대응하도록 지시해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거의 매일 ‘노조원이 회사의 기물을 부쉈다’ ‘노조원이 회사 간부를 폭행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언론에 뿌렸다. 노조의 폭력성을 부각해 경찰 투입으로 파업을 종결시켜야 한다는 의도에서였다.

그럴 때마다 정 의원은 “왜 일을 시끄럽게 만드느냐”며 그를 크게 나무랐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은 노조에 물러서면 안 된다며 강경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구사대가 노조원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며 한유동 전무가 구속되면서 이 전 회장은 사내에서 눈엣가시 같은 신세가 됐다. 주변 인사들의 말에 따르면 매일 열린 대책회의에서 정 의원을 비롯한 현대중공업 임원 11명이 이 전 회장을 성토했다고 한다. 회의장은 1대11로 이 전 회장이 ‘왕따’당하는 분위기였다. 이러면서 정 의원은 이 전 회장의 ‘튀는 행동’을 못마땅해했다는 것이다.

정 의원 비서 출신의 말이다.

“어느 날 이 전 회장이 정 의원에게 뜬금없이 뭔가를 보고하겠다고 왔어요. 그러자 정 의원이 짜증을 내면서 ‘당신은 화장실에서 갑자기 생각난 아이디어를 나한테 보고하지 말아요’라고 면박을 줬어요. 그리고 정 의원은 한 사람을 평가할 때 최소한 주변의 세 사람한테 물어보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이 전 회장을 모두 좋지 않게 평가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정 의원이 이 전 회장 스타일을 몹시 싫어한 것은 분명했어요.”

이 전 회장은 이와 관련, “전문경영인이 오너를 만나러 간 것은 불러서 가는 것이지…”라고만 대꾸했다.
 
■중장비 프로젝트로 다시 대립

파업 사태가 수습되고 회사가 안정되자 현대중공업은 중장비 부문에 신규 진출한다. 그런데 중장비 판매총책임자가 이 전 회장이었다. 그는 첫해부터 흑자를 낸다는 전략을 세웠다. 현대차 판매망을 이용해 역량을 축적한 다음 독자 판매망을 구축한다는 계획이었다. 전국 250여 개 판매점을 보유한 현대차 상용사업부에 현대중공업 직원을 파견해 판매경험을 쌓도록 하되, 현대차 상용사업부 자체적으로도 중장비를 함께 팔도록 한다는 계산이었다. 이들에게 판매가의 9%를 인센티브로 주기로 했다. 고 정세영 회장을 찾아가 이런 전략을 설명하고 허락까지 받아냈다.

반면 정 의원이 마련한 판매전략은 이 전 회장의 그것과 크게 달랐다. 초기에 1000억원을 투입해 전국에 직원 10명씩 50개의 독자적인 판매망을 구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되면 첫해에 200억~300억원의 적자를 감수해야 한다.

중장비 사업부 전략을 정 명예회장에게 보고하기로 한 날. 정 의원은 이 전 회장을 불러 “그런 얘기는 하지도 마라. 오늘 보고하는 자리에 당신은 들어오지 마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유모 부사장에게 지시해 만든 전략계획서만 들고 정 명예회장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잠시 뒤 정 명예회장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이 전 회장에게 빨리 들어오라는 지시였다. 이 전 회장이 정 명예회장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판매책임자인 넌 뭐하고 자빠졌느냐. 중장비 판매계획서를 작성하지 않았어”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는 서둘러 자신이 짠 전략계획을 보고했고, 정 명예회장은 이 전 회장의 안(案)을 낙점했다. 이 사건 뒤 두 사람은 거의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됐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귀띔이다.

90년 정 의원은 이 전 회장을 현대해상화재보험으로 내보낸다. 당시 현대에서 금융 계열사는 ‘한 수 아래’로 취급됐다. 그래서 현대중공업 전무가 현대해상으로 가면 부사장급 이상으로 가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은 전무로 수평이동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 전 회장은 현대에서 ‘전무만 11년’ 한 이색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정 의원에게 물을 먹은 셈이다. 이 전 회장은 “부인까지 사표를 내라고 했지만 정 명예회장이 불러서 금융을 배우라는 말에 눌러앉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0년 ‘성은(聖恩)’ 시비

이 전 회장은 현대그룹 형제간 경영권 분쟁인 이른바 ‘왕자의 난’ 때 안팎에서 불화의 씨앗으로 지목받았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으로 감옥에 갔다 와서 사표를 냈습니다. 그런데 정 명예회장은 사직서를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더니 ‘사무실을 줄 테니 여기 와 있어’라는 겁니다. 거의 매일 나를 불러 계동 현대그룹 본사 사옥에서 두 시간가량 같이 있었어요. 아침부터 정 명예회장 집무실에서 ‘용의 눈물’ 드라마를 녹화해서 보곤 했어요.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다큐멘터리를 봤죠.”

이 전 회장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내가 정 명예회장과 함께 있다가 나오면 정 의원이 문밖에서 지키고 서 있다가 잠깐 보자고 해요. 명예회장과 무슨 얘기를 했는지 꼬치꼬치 캐묻는 겁니다. 어떤 때는 아버지에게 나쁜 얘기만 해서 집안 분란을 일으킨다고 나무랐어요. 그래서 내가 ‘회장님이 불러서 가는데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고 따졌죠. 그러자 정 의원은 ‘다음부터 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는 박세용 구조조정본부장과 함께 들어가라’고 요구하기도 했어요. 오너와 그의 아들 틈바구니에서 입장이 난처했어요.”

이 전 회장은 정 명예회장이 자신에게 부채의식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99년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으로 자신이 구속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전 회장은 오래전부터 “내가 정 의원의 죄를 뒤집어쓰고 대신 감옥에 간 것”이라고 했다. 그는 “99년 9월 초 정 명예회장이 청운동 집으로 나를 불러 ‘몽준이가 국회의원인데 고생시킬 수 없다. 이 비서가 고생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 의원은 내가 옥살이를 할 때 두 번이나 면회를 왔어요. 정몽구 회장은 ‘아버지 성화에 살 수가 없어요. 빨리 이익치를 (교도소에서) 빼내도록 손을 써라고 하셔서 죽겠어요’라고 말하기도 했죠.”

이런 사연이 있다 보니 정 명예회장이 그의 사표를 반려하고 곁에 두었다는 얘기다. 이 전 회장은 “그러나 주변에서 자신이 받는 이런 성은(聖恩)을 시기했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이 전 회장은 주원장(朱元璋)의 ‘복심(腹心)’이었던 유기 얘기를 꺼냈다.

명나라를 창업한 주원장은 자신의 고향인 안휘성 출신들을 측근으로 데리고 있었다. 이들의 모함으로 자신의 책사였던 유기가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됐다. 주원장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주원장은 공신회의 때 유기를 참석시켰다. 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유기의 권위가 섰다. 측근들은 주원장이 보살피는 사람이라 생각해 이런 유기를 죽이지 못했다. 이 전 회장은 주원장과 유기 사례를 들면서 자신도 정 명예회장에게 성은을 입자 정 의원 등이 음해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 의원 측의 얘기는 다르다. 2000년 정 명예회장이 유서를 새로 쓰면서 현대중공업을 정몽헌 회장에게 넘긴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 전 회장의 ‘간계’라는 얘기다. 이 사실에 격분한 정 의원이 이 전 회장의 사표를 받으라고 소란을 떨기도 했다는 것이다.
 
■2002년 ‘정몽준 저격수’ 자청

이 전 회장은 ‘왕자의 난’ 주범으로 몰려 2000년 9월 끝내 사표를 냈다. 두 사람의 악연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정 의원의 대선 가도에서 이런 악연은 되살아난다. 이 전 회장이 급브레이크를 걸었던 것이다. 2002년 10월 27일 미국에 체류 중이던 그는 돌연 일본 도쿄에 나타났다. 기자회견을 자청한 이 전 회장은 “99년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에 정 의원이 개입했다. 비도덕적인 사람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며 대선 후보였던 정 의원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정몽준 의원실 관계자는 “당시 (이 전 회장의 폭로가) 정 의원 지지도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시는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었다”고 했다. 정 의원은 이 전 회장에게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정 의원은 ‘후보직 사퇴’라는 배수진을 치고 의혹을 부인했지만 여론은 싸늘해졌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에게 단일후보 자리를 내줘야 했다. 정 명예회장에 이어 2대(代)에 걸친 정씨 일가의 대권 도전이 좌절된 순간이었다. 지금도 스스로 ‘현대의 몸종’을 자처하는 전문경영인에 의해 좌절된 것도 아이러니다.

이 전 회장과 정 의원의 악연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8년째 계속되고 있는 ‘이익치 재판’ 때문이다. 이 전 회장은 “현대중공업 지급보증은 정씨 일가가 결정한 일이다. 현대증권은 이를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은 것일 뿐”이라며 자신은 무죄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 전 회장 측 변호인단은 정 의원에게 증인 출석을 거듭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 의원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다음 재판은 11월 23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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