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라크 찾은 화가 6명의 '캔버스 리포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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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막연히 이라크의 여성들을 찾아가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자식이 부상을 당했거나, 집이 무너졌거나, 남편을 잃어 삶이 막연한 상태가 되었거나 등등으로 추측되는 장면들을 떠올리며 아픔을 나누는 자세로 그들을 기록해 보려는 마음도 야무지게 먹었다." 사진가 박영숙씨는 지난해 8월 이라크로 떠나기 전 이런 태세였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종전을 선언했으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그 땅에서 박씨는 전쟁과 무관하게 돌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건강한 일상을 발견했다.

식구 수는 점점 줄어들어 안주인 혼자 떡 버티고 찍은 가족 사진은 슬프면서도 당차다. 이라크를 향해 떠났던 한국 미술가 6명이 본 것은 미국에 꿇리지 않는 정신의 아름다움이었다. 10대에 한국전쟁을 겪은 작가 윤석남씨는 그래서 작품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


이라크로 들어가는 국경에 선 박영숙(맨 오른쪽)씨 뜽 한국 작가들.

3월 30일까지 과천 제비울미술관에서 열리는 '바그다드 5백51㎞'는 전쟁을 다룬 그림 보고서이자, 21세기판 '홀로코스트(대량학살)'현지 르포다. 윤석남.이종구.박영숙.정복수.정원철.최민화씨는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바그다드 거리에서 여전히 활기에 넘치는 사람들을 보았다. 작가들은 지레 마음 속에서 짐작한 전쟁을 내버리고 새 눈을 떴다. 이종구씨는 '주인을 찾습니다'란 작품에서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안에서 발견한 군인들의 사진과 물건을 통해 파괴된 이라크를 보여준다.

바그다드에서 많은 물건을 줍고 채집해온 그는 그 물건들에서 전쟁의 냄새를 맡는다. 이씨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죽음과 추악한 폭력, 전쟁의 비인간화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윤석남씨는 바그다드에서의 7일을 50여점의 소묘로 남겼다. 길거리를 집 삼아 담배를 파는 이라크 소년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한국 소년들의 모습과 겹친다. 지금은 하찮은 몰골로 떠돌지만 그 아이들이 몇십년 뒤 자존심 강한 이슬람의 자식들로 우뚝 설 날을 작가는 내다본다. 그는 작품을 마무리하며 오히려 힘이 났다고 했다."압제와 전쟁 속에서도 힘이 넘치던 이라크인들에 대한 기억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도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삶은 지속된다'에 대한 나의 작은 믿음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씨 지원으로 이뤄져 더 훈훈한 뒷얘기를 남겼다. 2003년 5월 열었던 개인전 '대한민국 태극기'전에서 수익금이 나오자 조씨는 "한국 미술인 눈으로 본 이라크 전을 남기자"고 제안했다. 전시를 기획하고 작가들과 함께 이라크를 다녀온 이승미 제비울미술관 학예실장은 말한다."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얼마 전에 전쟁이 끝난 아프가니스탄은 어찌 되었을까. 왜 사람들은 그곳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일까. 그곳은 평화를 되찾았을까." 02-3679-0011.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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