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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읽기] 근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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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 여름, 지인들과 도쿄를 여행하다 느닷없이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3』에 나오는 구절이 떠올랐다. 플라톤과 아리스가 나누는 가상대담이었는데, 아리스가 플라톤에게 “그럼, 이 세상은 원상(이데아)-복제(현실)-복제의 복제(그림)라는 세 층으로 나누어지는 셈인가요”라고 물어본다. 도쿄가 상징하는 근대성은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단지 서구 근대라는 이데아를 복제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서울의 그것은 도쿄의 것을 복제한 것이니, 복제의 복제, 즉 시뮬라르크가 되고 만다.

돌아와 읽어본 『일본 근대의 풍경』(그린비)은 이를 다시 확인해준다. 이 책은 옮긴이들이 말하듯 “근대의 초석이 놓인 메이지 시대를 원점으로 하여 일본의 근대화=문명화=서구화 과정이 낳은 풍경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서 반복되는 구문이 있으니, “해외에 나가 ○○○라는 것을 견문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일본 근대의 뿌리가 서구에 두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예를 들자면, 박람회가 있다. 서양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박람회를 알고 있던 일본은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를 시발로 해외박람회에 잇따라 참가한다. 그리고는 1871년 물산회라는 이름으로 국내박람회를 열게 된다. 운동회도 마찬가지다. “서양에서 수입한 것”인데, 메이지 10년대부터 정착됐다고 한다. 1885년에는 초대 문부대신 모리 아리노리가 체육을 통한 집단훈련을 장려하면서 소학교에까지 보급되었다. 연필·비누·선풍기·전등·전화 같은 일상적인 물건도 그러했다. 오죽하면 “구두의 편리함에 놀라 조리를 버리고 구두로 바꿔” 신었다고 했겠는가.

『한국 근대사의 풍경』(생각의나무)을 볼라치면, 무척 우울해진다.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진 근대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추진된 것이라 그러하다. 근대의 상징물로 철도만한 것이 없을 터다. 공간과 시간을 동시에 지배할 수 있는 권능을 인간에게 안겨준 철도가 이 땅에 놓인 것은 1899년. 하나, 우리에게 “철마는 서구와 전혀 다른 야수와 폭군의 얼굴로 나타났다”. 철도용지를 강제로 징발당하고 노역에 동원됐다. 거기에다 철도부설의 목적이 군사용이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새 상품 시장을 만들고 근대문화와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촉매구실”을 애초에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의 명동과 충무로, 그리고 을지로 일대도 일본의 근대성이 이식된 곳이다. 한일합병 뒤에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새로운 상권으로 개발했는데, 작은 도쿄로 발돋움했다. 이 일대가 식민지 시절 근대의 표상으로 숱한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문학작품에서 확인된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가 하루 종일 거닌 곳도 이곳이며, 이상의 ‘날개’에 나온 내가 헤맨 곳도 여기였다.

『미학오디세이 3』에는 또다른 가상대담이 실려 있다. 이번에는 플라톤과 디오게가 등장인물. 디오게가 플라톤에게 존재하는 것은 책상‘성’(性)이 아니라 책상‘들’이라고 대꾸한다. “시뮬라크르를 긍정하라는 얘길세.” 이 말을 받아들이면, 식민지 근대화론을 인정하게 된다. 비록 그것이 근대의 시뮬라크르라 해도, 이를 통해 본격적이고 집단적으로 근대체험을 했으므로 역사의 한 발전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역사에 기록된 그 한 많은 피와 눈물은 어찌할 것인가.

이권우<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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