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과문화

시대적 몸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민속적으로 해마다 일정하게 지키어 즐기는 날’-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명절’의 뜻풀이다. 사전대로 치자면 요즘 추석은 명절이 아니다. 수많은 이에게 추석은 즐기는 날이기는커녕 피하고 싶은 날이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를 언론은 민감하게 반영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신문 방송은 마치 추석이 즐거워야 하는 날이라도 되는 듯 명절 분위기 띄우기에 나서곤 했다. 선물 보따리를 챙겨 든 귀성 인파, 함께 송편을 빚고 차례를 지내는 고향집 풍경을 단골 메뉴로 전했었다. 그러나 올해 언론이 전하는 추석 풍경은 실질적이면서도 부정적이다. 신문을 펼치니 ‘추석 때 가족 갈등 줄이려면’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고, TV를 켜니 추석 때 흔히 듣는 말 중 하나가 ‘명절 없어졌으면 좋겠다’라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윷놀이 판을 벌이고, 달 구경을 하며, 함께 어울리는 민속 명절 한가위는 이제 풋내기 리포터의 스케치 기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귀성 전쟁이 가장 중요한 추석 뉴스가 됐고, 추석 스트레스나 추석 파경(破鏡) 따위의 조어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어릴 적 내게 추석은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었다. 무엇보다도 추석빔 때문이었다. 큰집으로 차례를 지내러 가기 전 아버지가 고이 챙겨 두었던 나일론 점퍼나 쫄쫄이 바지, 별로 얻어 걸리는 것이 없을 적에는 양말 등 새 옷을 내어 주셨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설빔·추석빔이 사라진 지도 수십 년이 됐다. 명절 때에야 아이들을 새 옷으로 단장시킬 수 있었던 ‘궁핍의 시대’의 습속은 이제 옷이 넘쳐나는 ‘풍요의 시대’에 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상스럽게도 경제적 풍요가 찾아오면서 명절은 점점 초라해지더니 이제는 아예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이처럼 명절의 의미가 변화한 것은 우리 사회의 폭넓은 변화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근대화를 통해 전통적 농경사회에서 근대적 자본주의 산업사회로 급속히 이행하면서 우리의 삶은 전면적인 구조적 변화를 겪었다. 대가족 중심의 전통적 공동체 질서가 해체됐고 도시화가 격렬하게 진전됐다. 고향은 개발 열기 속에 낯선 객지가 돼 버렸다.

농경사회의 리듬에서는 하루 이틀 일을 미루고 명절을 축제로 즐길 수 있었지만, 꽉 짜인 근대적 노동 구조 아래서 명절은 또 다른 고역이 돼 버렸다. 근대화는 이산(離散)과 이동성의 증대를 빚어내면서 귀성이라는 민족 대이동을 연례행사로 만들었다.

삶의 틀이 바뀌면 생활 패턴도 달라지고 의식과 태도도 바뀌게 된다. 요즘 추석 스트레스를 가장 크게 느끼게 된 이유는 이제 우리가 확고하게 근대적 의식과 태도를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엔 차례 차림이 공동의 축제에 동참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왜 내가 떠맡아야 하나?”를 묻게 됐다. 전통적 질서에 바탕을 둔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각자가 개인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각자를 가족 공동체에 끈끈하게 묶어 두었던 효(孝) 개념은 이제 약효가 다했다. 가부장인 아버지를 중심으로 구성됐던 대가족제는 핵가족제로 바뀌었고, 가정의 중심은 아버지에게서 아이에게로 옮아갔다. 여성들은 가족공동체를 위해 희생만 하던 데서 벗어나 스스로 삶의 의미를 묻게 됐다.

그런데 의식 변화의 속도는 각자의 교육 수준, 가족 내 위치, 성별, 계급 등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 사회처럼 급속한 변화를 겪은 사회에서는 세대 차가 결정적 차이를 빚는다. 나이가 많아 전통적 공동체의 경험이 길수록 근대적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 늦어진다. 예컨대 며느리의 의식 변화를 시어머니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추석 스트레스라는 것은 개인들의 잘못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틀과 그에 조응하는 의식이 전근대에서 근대로, 나아가서는 탈근대로 급속하게 변화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추석 스트레스는 사회의 격렬한 변화를 겪고 있는 우리 각자가 앓는 시대적 몸살이 아닐까.

곽한주 동아방송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