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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그렇게 해서 남녀 각 여덟명이 골목 안에 남게 됐는데 남녀칠세 지남철이라는 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여자애들이 양아 하나만 빼고는 꽤 수준급이었다는 사실입니다.그래서 우리는여자애들과 다투기 보다는 끌어안는 분위기를 조성 하려고 들었습니다. 『쟤들이 뭘 잘못했다구 그랬니… 계집애들끼리.』 『빨리저 계집애들이나 쫓아가서 빵이라도 사달라구 그래 보지 그러니.
저것들은 남의 걸 잘 훔치니까 돈도 많을 거라구.』 벽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여자애가 그랬습니다.걔는 얼굴에 주근깨가 있었는데 눈이 깊고 코가 높아서 아이노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하여간 그 여자애들 중에서는 그애가 캡인 모양이었습니다.그애의 이름은(나중에 안거지 만)선희였고 그래서 우리는 걔를 써니라고 불렀습니다.
『자 비켜줘.너흰 왜 이러고 있는 거지.깡패처럼….』 써니가골목 입구를 봉쇄하고 서 있던 우리를 제치면서 한길로 나갔고 덩치며 다른 여자애들도 써니를 뒤따랐습니다.
우리는 사실 좀 당황해서 척척 의연하게 행동하지 못했는데 그건 써니의 말과 행동이 어딘가 우리를 압도할만큼 어른스러웠고 게다가 품위인지 뭔지 그런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저것들 그냥 가네… 어떡하지….』 그냥 보내기는 아깝다는 데에 우리는 곧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그래서 우리 중의하나가 뛰어가 써니네에게 우리의 의사를 전달했습니다.옷깃이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짝도 맞잖아 어쩌구 그랬다고 합니다.
바쁘니까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양아가 그러더랍니다.원래 못생긴 애들이 다 초치는 법이니까 놀랄 일은 아니었습니다.우리는써니네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애들이 가는대로 굴다리로 해서 이대입구 쪽으로 갔습니다.여자애들은「날개」 라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는데 써니가 웃는 얼굴로 우리를 한번 뒤돌아본 다음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이 제대로 풀려간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날개에 들어서서 보니까,여자애들은 앞자리를 비워두고 나란히 앉아서 노골적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희들에겐 사람을 끄는 힘이 있어.특히 너 말이야.』 내가일부러 양아의 앞자리에 앉으면서 그랬습니다.그건 집에서 형에게배운 걸 실천해 보자는 의미도 있었습니다.못생긴 여자애에게 잘해주면 몇배의 보상이 오지만 잘난 애에게 잘하는 건 본전을 찾기가 어렵다는 게 형의 지론이었습니다.
여자애들과 우리는 전부터 친했던 것처럼 굴었습니다.먹을 걸 사이에 두고 웃고 장난치며 놀았는데 그래야 날개 안의 사람들이볼 때 양측이 서로 쪽팔리지 않게 되는 거였지요.아까 골목에서풀어준 계집애들이 써니의 삐삐를 훔쳐갔던 일도 알게 됐습니다.
적당히 탐색하는 시간이 지났을 때 우리 중의 하나가 동전들을꺼내서 사인펜으로 숫자를 썼습니다.짝을 정하자는 거였습니다.숫자가 쓰인 동전 여섯개를 뒤집어서 깔아놓고 섞은 다음에 하나씩집으라고 했습니다.1-2-3이라고 쓰인 동전이 각각 두 개씩이니까 거기서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난 그냥 기다릴래 라고 말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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