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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감 빼앗아간 의보수가(특진/중병앓는 의료현장:9)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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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고향서 개원 3년… 어느 젊은 치과의사 편지/충치 치료비 비싸 노인들 “빼달라”/잇몸으로 지내는 것 보면 서글퍼/시간 뺏기고 값싼 사랑니환자 기피도
경북 봉화군 봉화읍에서 치과의원을 개원하고 있는 김시원씨(32)가 중앙일보의 「특진­중병앓는 의료현장」 시리즈를 읽고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다.
김씨는 이 글에서 농촌에서 개업하고 있는 젊은의사 입장에서 척박한 농촌 의료현장의 체험과 의료부조리 등을 진솔하게 나타내고 있다.<편집자주>
저는 89년 서울에서 경희대 치대를 졸업한뒤 3년간 공중보건의 복무기간을 거쳐 92년 5월부터 고향인 봉화에서 치과의원을 열고 있습니다. 이곳은 인구 1만5천여명의 조그마한 읍소재지입니다.
개원 당시 가족들은 『남들은 서울로 올라가려 안달인데 왜 돈벌이도 시원찮을 시골로 가려하느냐』며 적극 말렸습니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버린 농촌에서 치과치료를 거의 못받고 있는 고향의 노인·어린이들을 나마저 외면할 수 없다는 초년병 의사의 어쭙잖은 사명감은 결국 시골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겨우 개원 3년째를 맞으면서 저는 후회하고 있습니다.
모순투성이인 의료현장에서 사명감은 이미 체념으로 바뀐지 오래입니다.
의사로서 최소한의 양심마저 사실상 저버리도록 강요하는 현실에 절망감마저 듭니다. 저의 치과의원을 찾는 환자는 농촌 노인들이 대부분입니다.
충치가 심해져도 단돈 1만원이 없어 1주일씩 고통을 참아내다 할 수 없이 오게 되는 분들입니다.
이럴때 충치 치료방법 두가지를 놓고 저의 고민은 시작됩니다.
치아를 뽑지않고 보통 4회 가량 신경치료를 할 경우 보험이 적용되는 진료비는 환자부담금 1만2천8백원과 의료보험 급여 2만여원입니다.
치아를 아예 뽑아버릴 경우(발치)에는 환자부담금 6천4백원,의료보험 급여 6천여원에 불과합니다.
신경치료를 한뒤엔 해당 치아 1개만 새로 넣어도(보철) 되므로 18만원이 추가되지만 발치하면 치아 3개를 보철해야 하므로 54만원 이상이 듭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당연히 신경치료 방법을 선택해야겠지요. 그러나 신경치료 방법이 번거로운데다 발치한뒤 보철을 하게 되면 수입이 상당해 환자가 원할 경우 치아를 뽑아주게 됩니다.
문제는 환자들이 치아를 뽑으려는 이유가 의사인 저와 사뭇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이분들은 당장 치료비 6천원을 줄이려고 발치를 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생동안 보철을 않은채 치아없이 생활하실게 뻔한데도 말입니다.
그동안 저는 이런저런 이유로 노인분들의 뽑지 않아도 좋을 치아를 뽑으면서 그때마다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인술을 행한다는 의사의 양심상 그래서는 안되겠지요. 그러나 환자의 요구나 현실을 외면할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해 의료현장과 동떨어진 낮은 의료보험수가 때문에 환자와 의사는 다같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개인 치과병원에선 사랑니를 뽑으러 오는 환자는 웬만하면 큰병원으로 보냅니다.
사랑니는 입안 맨뒤 구석에 비스듬히 솟기 일쑤여서 잇몸을 헤집고 치아를 쪼개 뽑아야 하므로 땀을 뻘뻘 흘리며 1∼2시간씩 걸리는데 처치료는 5천2백20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치아를 자르는데 사용하는 고속회전 절삭기구 「바」 재료비 2천원을 제외하면 웬만한 대학생 아르바이트 시간수당이나 될까요.
농한기면 시골이라도 대기환자가 밀리니 사랑니 환자는 왕복 하루가 걸리는 대구시내 종합병원으로 보내게 됩니다. 이 때문에 환자들은 예약이 한 두달씩 밀린 병원에서 대기하는 동안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이 환자도 그리 반가운 손님은 아닙니다.
다른 어느 병원보다 치과에선 어린이들이 더욱 겁을 먹기 때문에 이를 달래느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경우가 흔한데 진료비는 고작 3천2백원입니다. 대부분 개인치과에선 이 때문에 소아환자를 기피,대학병원으로 보내는데 수련의에겐 20일,전문의에겐 2개월까지 진료대기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잘못된 의보수가체계 때문에 빚어지는 진료부실·소홀책임을 의사에게만 돌려야 할까요.
물론 대도시 의사중 일부는 환자를 가려받거나 과잉 진료 등으로 상당한 수입을 올려 빈축을 사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아무리 의사의 사명감과 양심을 강조한다해도 사실상 병원 운영이 어려울 경우 어떻게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의사수업시절 독일에선 개원한지 1년된 의사나 수십년된 유명의나 연간소득은 비슷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유명의는 1년에 3∼4개월만 진료해도 되고 초보의사는 거의 1년내내 환자를 봐야 합니다. 의사의 일정수입은 보장되고 그 이상은 세금으로 거둬들이기 때문에 의사들은 나머지 시간을 자신의 재충전에 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료체계도 하루빨리 개선되어야 합니다.
의사들이 수입 올리기에 급급해 1년내내 진료에만 매달리도록 할게 아닙니다. 일정수준의 소득을 보장해준뒤 의사도 공부안하면 도태하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도 결국 환자들에게 보다 나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이제 우리나라도 의료선진화를 위해 모두의 지혜를 모을 때가 됐습니다.
농촌의 젊은의사가 희망과 보람을 찾을 수 있도록 하루빨리 의료개혁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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