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42. 파스퇴르 부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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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97년 11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부도를 냈다. 이른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들어간 것이다. 거리로 내쫓긴 샐러리맨이 적지 않았다. 지하철역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이나 공원 등에서 새우잠을 자는 노숙자가 점점 늘어났다. 수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았다. 살아남은 기업들도 감량 경영에 들어갔다.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던 파스퇴르유업에도 위기가 닥쳤다. 우유 및 유제품 시장이 찬물을 덮어쓴 것처럼 얼어붙었다. 특히 중산층 이상을 대상으로 고품질 고가 유제품 판매에 치중해 온 파스퇴르유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매출액이 50% 넘게 줄어들었다. 설상가상으로 계속 증가하는 국내 축산농가의 원유(原乳) 생산비에 대한 부담이 유가공업체들의 경영에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분유와 이유식에 들어가는 일부 수입 원료의 가격도 크게 올랐다. 업체들은 매출액 급감과 비용 급등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의 경영 환경이라면 돌파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경영자의 피와 땀으로 뒤어넘을 수 없는 복병이 나타났다. 외환 위기로 은행을 비롯한 국내 금융계가 벼랑 위에 서는가 싶더니 마침내 파스퇴르유업과 거래해 온 A종합금융이 파산하고 말았다. 민족사관고 교사 증설에 투자한 빚을 한꺼번에 갚으라는 독촉이 빗발쳤다. 업종을 다변화하기 위해 설립한 파스퇴르식품의 설비 투지에 들어간 리스 채무도 목을 죄어 왔다. 금융회사들의 다급한 요구에 부응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했으나 헛일이었다. 매출액 감소로 시장에서 돈이 들어오지 않을 때는 필요한 자금을 금융회사에서 조달해야 하는 데 바로 그 금융업계가 경색되는 바람에 파스퇴르유업은 숨통이 막혀버린 꼴이었다. 이런 경우를 예상하지 못했다니…. 후회는 이미 늦었다.

98년 1월까지 나는 회사의 몸집을 줄이는 등 회생을 위해 온힘을 쏟았다. 구원을 요청할 곳은 없었다. 모두 제 코가 석자였다. 회사가 어려워지고 앞날이 불투명해지자 서둘러 퇴직하는 사원들이 늘어났다. 그들의 퇴직금에 보태기 위해 내가 소유한 유일한 부동산이던 아파트를 팔았다. 나와 가족 명의의 회사 주식도 전량 회사에 기부키로 결정했다. 그러자 회사에 남은 임직원들은 경영이 정상화될 때까지 최저생활비만 받겠다고 결의했다. 이와 함께 다른 업체가 우유의 원가 상승을 이유로 가격을 올릴 때 나는 파스퇴르제품 가격을 종전대로 유지했다. 상대적으로 가격을 내린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분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런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부도의 위기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예상대로 98년 1월 말부터 부도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왔다. 결국 그해 2월 1일 파스퇴르유업은 최종 부도 처리됐다. 겨우 창업 11년 만에 회사는 문을 닫고 말았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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