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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이튼보다 좋은 학교 만들어 큰 장사할 것" 민사고 설립 [최명재 1927~2022.6.26]
민족사관고등학교(민사고)의 설립자 최명재 전 파스퇴르유업 회장이 2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 고 최명재 민사고 이사장. 뉴스1 1927년 전북 김제군에서 태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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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재 민사고·파스퇴르유업 설립자 별세
최명재 민족사관고등학교(민사고)의 설립자 최명재(사진) 전 파스퇴르유업 회장이 2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5세. 1927년 전북 김제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만경보통학교,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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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장사할 것" 민사고 설립…최명재 전 파스퇴르유업 회장 별세
민족사관고등학교(민사고)의 설립자 최명재 전 파스퇴르유업 회장이 2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 최명재 민사고 이사장. 중앙포토 1927년 전북 김제군에서 태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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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고 최후호소 "폐교는 막아달라"…당국 "특성화고도 안돼"
강원 횡성군 민사고 교정. 남궁민 기자 학생 수가 줄면서 지방 학교가 폐교한다는 소식은 드문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최근 한 산골 학교가 문을 닫으려 한다는 소식이 큰 반향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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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상영 KCC 명예회장 유산 1500억 소리박물관·민사고에 기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막냇동생인 고 정상영 KCC 명예회장. [사진 KCC] KCC그룹 일가가 고(故) 정상영 명예회장이 보유했던 1500억원 상당의 주식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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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고 들어가려면 꼭 거쳐야한다···학교 앞 우유공장 숨은 뜻
롯데푸드 횡성공장에서 연구원이 품질 관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롯데푸드 1세대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인 민족사관고등학교에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다소 생소한 광경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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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도 벤치마킹 오는 민사고…정부가 숨통 끊어”
한만위 민사고 교장은 28일 ’일반고 전환되면 폐교를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폐교가 눈앞에 있다. 고통스럽다.” 한국의 ‘원조 자사고’로 꼽히는 민족사관고(민사고) 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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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판 돈 1000억 부었는데···존폐위기 민사고의 눈물
2019년 자사고 재지정 못 받으면 일반고 전환하거나 문 닫을 수도 파스퇴르유업 성공으로 번 돈 교육에 투자…기업은 가고 학교만 남아 민족사관고는 1996년 강원도 횡성에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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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익 1% 기부, 메르스 때도 지킬 수 있어 다행”
이진우 하이로닉 대표가 20일 강원 횡성 민족사관고에 장학금을 전달했다. 민사고 인문사회관 앞에서 왼쪽부터 최경종 민사고 이사장 대행, 이 대표, 정진곤 민사고 교장, 최관영 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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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선배와의 대화] 삼성전자 김용훈씨 “1·5·10년 뒤를 그려 보세요”
삼성전자 시스템 LSI사업부 김용훈 책임이 구직자를 상대로 강의하고 있다. [사진=강정현 기자]“가고 싶은 회사를 정할 때 꼭 고려해야 할 것은 연봉이나 업무강도가 아닙니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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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르포] 민족사관고는 요즘…
장면 #1 "민사고는 자립형 사립고로서 자율적인 교과과정 운영이 특징입니다." 지난 9일 오후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민족사관고등학교 소강당. 이 학교 최관영 입학관리실장이 열성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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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쿠르트, 파스퇴르 인수
한국야쿠르트가 파스퇴르유업을 인수했다. 한국야쿠르트는 최명재 회장 일가가 보유하고 있는 파스퇴르 유업 주식 100%를 500여억원(부채 포함)에 인수했으며, 다음달 초부터 본격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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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변화의 씨앗 품은 사람들
그동안 동물을 이용하는 데 그쳤던 줄기세포를 세계 최초로 사람 난자에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부작용없이 여러 가지 난치병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튼 국내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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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재 회장, 본지 연재물 엮어 자서전 내
국내 최초로 저온살균 우유를 생산하고 '민족사관고'라는 독특한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등 끊임없이 화제를 만들어온 최명재(崔明在.77) 파스퇴르유업 회장이 10일 자서전을 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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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유전쟁] 50. 이어 달리기
"서울 강남은 물론 전국적으로 민족사관고반을 운영하는 학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민사고 진학 전문학원까지 생겼습니다." "미국의 대학들이 민사고 출신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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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유전쟁] 49. 세배 온 졸업생들
2003년 1월 초 어느 날. 눈길을 무릅쓰고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민족사관고 졸업생들이었다. 미국 유학생 한명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생 두명, 그리고 서울대생 한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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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유전쟁] 48. 유가공업계 불황
최근 몇 년간 유가공산업이 위기를 맞았다. 우유 소비가 줄어든 것이 근본 원인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양가보다 맛을 좇는 경향이 우리나라 식음료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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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유전쟁] 47. 生死 갈림길
2000년 봄. 나는 몸에 이상이 오는 걸 느꼈다. 밤에 잠을 이루기 어려웠고 자주 짜증이 났다. 나도 모르게 파스퇴르유업 간부와 민족사관고 교사.학생들을 야단치는 일이 잦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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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유전쟁] 46. 파스퇴르 회생
1998년 10월 춘천지법은 파스퇴르유업의 화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채무 변제가 한시적으로 동결돼 빚 독촉으로부터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나이 70에 겨우 철이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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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유전쟁] 45. 세계로 가는 길
나는 파스퇴르유업 부도로 인한 민족사관고의 위기를 돌파할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 중 하나가 외국 명문대 진학이었다. 그때까지 한국인의 해외 유학 길은 두 가지였다. 국내 대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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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유전쟁] 44. 민사고 폐교 위기
내가 부도 난 파스퇴르유업의 경영에서 물러나있던 넉달 동안 민족사관고는 '공황' 상태였다. 기숙사 난방은 고사하고 교사.학생들에 대한 급식을 걱정할 지경이 됐다. 파스퇴르 임직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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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유전쟁] 43. 파스퇴르 살리기
파스퇴르유업의 부도가 확정되자 내 마음은 뜻밖에도 평온해졌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이 돌파구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건 작은 희망이라도 보일 때이지 모든 희망과 가능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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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유전쟁] 42. 파스퇴르 부도
1997년 11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부도를 냈다. 이른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들어간 것이다. 거리로 내쫓긴 샐러리맨이 적지 않았다. 지하철역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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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유전쟁] 41. 과기대 설립 꿈
1997년 나는 새로운 구상을 했다. 민족사관국제고와 과학기술대 설립이었다. 민족사관고를 운영해 보니 외국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필요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