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르포] 민족사관고는 요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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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민사고는 자립형 사립고로서 자율적인 교과과정 운영이 특징입니다." 지난 9일 오후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민족사관고등학교 소강당. 이 학교 최관영 입학관리실장이 열성적으로 학교소개를 하고 있었다. 청중은 대전 만년중학교 학생과 학부모 70여명. 설명회를 마친 최실장은 "매일 단체 방문만 수백명에 이를 만큼 민사고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장면 #2 같은 시간 이 건물 1층의 법인사무국에서 근무 중인 최경종 법인 이사장은 회색 작업복과 작업화 차림이었다. 설립자 최명재 전 파스퇴르유업 회장의 아들인 그는 "지난달 파스퇴르유업의 매각 이후 작업복을 입고 있다"며 "재단과 학교의 앞날이 기로에 서있어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학교 곳곳에는 '경영 위기'가 감지된다. 교문 근처 생활관 뒤편에는 짓다 만 여학생 기숙사 건물의 골조가 흉하게 남아있다. 바로 옆 학생교육용 야외 골프연습장의 그물도 일부 훼손됐지만 보수를 못했다.

대표적인 '영재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은 민족사관고가 '홀로서기'라는 힘든 고비를 맞고 있다. 파스퇴르유업이 지난달 22일 한국야쿠르트에 매각되면서 든든한 후원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같은 재정문제가 불거지기 이전에도 민사고는 '자립형 사립고'를 옭아매는 여러 규제 탓에 어려움을 겪었다.

◇민사고는=설립 9년째인 민사고는 민간자본이 투입된 사립고교이면서 과학고 등에 못지않은 영재학교로 자리 잡았다. 그간 미국 명문대에 많이 입학시키는 등 우수한 실적을 올렸다. 그래서 입시학원에 '민사고 진학반'이 많이 생겼다.

최 전 회장이 만든 이 학교는 1996년 30명의 입학생으로 개교했다. 전원 기숙사 생활, 특성화 교육과정 등으로 개교 초기부터 관심을 모았다. 2001년에는 자립형 사립고 시범운영 학교로 지정됐다. 그러나 파스퇴르유업이 불황으로 98년 1월 부도를 맞고 그 해 7월 화의에 들어가면서 학교운영에 주름살이 졌다. 파스퇴르유업은 화의 기간 중에도 매년 30억~40억원의 기부를 통해 학교 재정을 지원했지만 매각협상이 본격화한 올 4월부터는 지원이 뚝 끊겼다. 6월 22일 파스퇴르가 한국야쿠르트에 넘어가면서 회사와 학교는 남남이 됐다.

하지만 학생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올해 일반계 신입생 박모(15)군은 "파스퇴르의 매각 소식은 모두 알고 있지만 학교 운영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선생님들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걱정하는 학생은 없다"고 말했다.

한편 민사고는 영재교육이라는 본래 목적과는 달리 우수 학생들을 선발해 국내.외 유명 대학 진학에만 초점을 맞추는 '입시 귀족학교'가 됐다는 일부의 비판도 받아왔다.

◇자구책 마련=이돈희 민사고 교장은 "그간 150명 입학정원의 절반 정도만 뽑았지만 2004학년도부터 정원을 채우고 있다"며 "450명의 총정원을 유지하고 장기적으로는 600명까지 늘려 학교 운영에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기숙사와 원어민 교사 등을 활용해 방학 중에 영어캠프를 여는 등 수익사업에도 적극적이다. 올해 여름방학에 개설한 영어캠프에는 초.중학생 300여명이 몰렸다. 기부금 유치에도 적극 나섰다. 그러나 이런 자구책으로는 학교 운영이 어렵다.

민사고 측이 밝힌 올해 학교 운영 예산은 약 70억원. 학생 280명의 학비(기숙사비 포함)가 30여억원, 수익사업과 기부금으로 10억여원을 걷어도 20억~30억원이 부족하다. 학생 정원이 늘고 수익사업을 늘려야 한 해 운영예산을 겨우 맞출 정도다. 그렇다고 규제 때문에 등록금을 올릴 수도 없다. 정부의 재정지원을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이런 이유로 민사고재단은 학교 운영을 대신 맡아줄 곳을 물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횡성=이승녕 기자

[뉴스 분석] 자립 막는 규제 곳곳에
수업료 상한선…입시도 맘대로 못 치러

민족사관고등학교가 재정적 위기를 맞으면서 자립형 사립고의 문제점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평준화의 보완책으로 자립형 사립고가 꾸준히 거론돼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립형 사립고 관계자들은 지금처럼 정부의 규제가 많아선 평준화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2000년 교육부장관 재직 당시 자립형 사립고 시범운영계획을 세운 이돈희 민족사관고 교장은 "학교에 이렇게 규제가 많은지 몰랐다"고 말할 정도다. 전주 상산고 홍성대 이사장도 "이런저런 제한이 많아 사실상 '자립'이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자립형 사립고 규제는 크게 ▶등록금 상한 규정▶재단전입금.장학금 비율 강제▶교과과정 및 선발 지필고사 제한 등이 있다.

전주 상산고의 사례를 보자. 올해 7억원, 내년에는 10억원의 재단전입금을 의무적으로 내야 한다. 학생들에게서 걷는 등록금의 25%를 재단이 의무적으로 부담해야 한다는 조항 때문이다. 장학금과 학교시설 개선비 투자는 별개다. 그러나 학생들에게서 걷는 등록금(수업료)은 지역 일반 고교의 세배 이내로 묶여 있다. '자립형'이라는 이유로 정부에서 한푼의 지원도 못 받는다.

교과과정 운영이나 선발 지필고사 제한에 대한 불만도 있다. 민사고 관계자는 "국민 공통 기본과목 이수 규정 때문에 조기 졸업이나 유학을 하려는 학생들에 대한 교과과정 운영이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육인적자원부는 시범운영이 끝나는 2005년에 성과를 평가하고 규제완화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많은 교육 전문가들은 조속히 사립은 사립답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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