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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유전쟁] 47. 生死 갈림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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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2000년 봄. 나는 몸에 이상이 오는 걸 느꼈다. 밤에 잠을 이루기 어려웠고 자주 짜증이 났다. 나도 모르게 파스퇴르유업 간부와 민족사관고 교사.학생들을 야단치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피곤했다. 좀 쉬라는 게 의사의 처방이었다.

그해 7월 우리 부부는 누적된 피로를 씻고 새로운 힘을 충전하기 위해 오랜만에 제주도로 휴가를 떠났다. 마침 제주 중문단지에 모호텔이 개관했을 때였다. 우리는 새로 문을 연 호텔에 묵기로 했다. 이튿날 골프를 치고 호텔로 돌아온 나는 늘 하던 대로 사우나실에 들어갔다. 나는 더운 물인지 찬물인지 살펴보지 않고 욕조에 풍덩 뛰어드는 스타일이다. 그날도 그런 식으로 욕조에 몸을 던졌다. 그 뒤 일어난 일은 악몽이었다. 호텔 사우나실의 온도 조절장치가 고장나는 바람에 욕조에는 목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뜨거운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내 몸은 화상 투성이였다. 제주 시내 한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다. 그러나 담당 의사는 응급처치만 해 주고는 "위험하니 서울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호텔 측이 주선해 준 대한항공 전세기편으로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왔다. 화상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는 한강성심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였었다. 의사들은 나의 재활에 부정적이었다. 몸의 80%정도 화상을 입은 노인이 완치된 사례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중화상은 사람의 몸이 회복될 수 있는 한계를 넘은 상태라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나는 세포가 되살아날 때까지 긴 세월을 극심한 통증과 싸워야 하고 2차 감염이 발생하거나 피가 썩는 패혈증이라도 오면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가끔 헛것을 보았다. 시커먼 그림자 같은 모습이었다. 염라대왕의 심부름꾼으로 착각하곤 했다. 한번은 담당 의사에게 "당장 내 곁에서 떠나라"고 고함 친 적도 있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생사의 한계를 넘나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패혈증 발생 고비를 간신히 넘긴 뒤부터 나는 삶의 의지를 되찾았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생각이 나를 붙들어 주었다.

사고가 난 뒤 1년반 만에 나는 휠체어에 몸을 싣고 회사에 나갔다. 학교 교무실에도 들렀다. 회사 직원들과 학교 교사들, 그리고 학생들이 모두 반갑게 맞아주었다. 문득 그들이 내 고통을 얼마만큼 알까하는 회의가 들었다. '즐거움은 나누면 두배가 되고 고통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말도 있지만 그 사건 이후 나는 고통은 나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눌 수 있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을 보면서 나는 일이든 삶이든 일차적으로 나를 위한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기업이 잘 되는 것도, 학교가 궤도에 오르는 것도 모두 나의 즐거움이고 보람이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들을 탓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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