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43. 파스퇴르 살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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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파스퇴르유업의 부도가 확정되자 내 마음은 뜻밖에도 평온해졌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이 돌파구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건 작은 희망이라도 보일 때이지 모든 희망과 가능성이 사라지면 오히려 홀가분해지는 것 같다. 나는 우선 파스퇴르유업 부도의 책임을 지고 경영에서 완전히 손떼겠다는 사실을 안팎에 공포했다. 신문에 장문의 사과광고도 실었다.

잠실에 있던 아파트까지 팔았기 때문에 나는 당장 갈 곳이 없었다. 작은 아파트를 세 얻어 분당으로 이사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신문.잡지 기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왕성한 의욕으로 기업과 학교를 세우고 경영하던 내가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지내는 걸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그들은 내 꿈의 좌절을 아쉬워했고, 나의 깨끗한 퇴장을 칭찬해 줬다. 그러나 회사 관계자는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물러난 뒤 파스퇴르유업은 공동경영체제로 들어갔다. 몇 개의 채권그룹이 참여한 비상대책위원회가 회사를 경영하는 체제였다. 파스퇴르 대리점들, 파스퇴르에 원유를 납품해 온 낙농가들, 그리고 은행.제2금융권.리스회사들로 구성된 채권금융단 등이 포함됐다. 회사 측과 노조도 가세했다.

그러나 비대위의 공동경영은 곧 한계를 드러냈다. 참여 단체들간 이해가 엇갈렸기 때문이었다.

1998년 3월부터 주로 금융채권단에서 나의 경영 복귀를 종용하는 말이 나왔다. 나는 응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민족사관고 운영에만 전념하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회사가 산으로 올라가는 배처럼 구심점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모두 내 책임이기 때문이었다.

4월 들어 금융채권단은 나의 경영 복귀을 강력히 요청해 왔다.

"결자해지(結者解之) 하시오. 만약 최회장님이 파스퇴르의 경영 정상화에 노력해 주지 않는다면 파스퇴르를 파산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금융채권단의 설명을 들으면 더 이상 내 고집만 부릴 수는 없게 돼 있었다. 대리점.낙농가.노조가 끼리끼리 뭉쳐 비상 경영을 하는 모습을 보곤 경영 정상화의 길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결자해지하라는 말에 나는 며칠 밤을 새며 고심했다. 뿌린 씨를 거두는 것은 남자의 할 일이다. 나는 회사에 나갔다. 부도를 내고 물러난 지 넉달 만인 그해 5월이었다. 그동안 회사에는 '최명재 복귀'를 반대하고 공동경영에 맛들인 세력이 커져 있었다. 본사 경영에 발을 들여놓은 일부 대리점주들도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아쉬워했다. 이들과 나의 복귀를 고대하던 세력이 충돌했지만 큰 불상사 없이 나는 경영에 복귀했다. 맨먼저 나는 회사 조직을 개편하는 동시에 화의를 신청했다. 그해 10월 16일 춘천지원은 화의 개시 결정을 내렸다. 파스퇴르의 소생과 정상화, 그리고 사회에 대한 기여 가능성을 법원이 인정한 것이었다. 한편 나의 경영 복귀 조건은 "민족사관고에 대한 지원은 계속한다"는 단 하나였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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