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46. 파스퇴르 회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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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98년 10월 춘천지법은 파스퇴르유업의 화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채무 변제가 한시적으로 동결돼 빚 독촉으로부터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나이 70에 겨우 철이 들었다"고 광고를 통해 국민에게 사과했던 나는 이번 기회에 심기일전키로 했다. 파스퇴르의 경영 정상화와 함께 민족사관고의 기반을 확실하게 닦아놓겠다고 다짐했다.

화의 개시 이후 파스퇴르가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자 떠났던 소비자들이 돌아왔다. 파스퇴르를 고집스러운 기업이라고 하지만 파스퇴르의 소비자들도 고집스러운 데가 있었다. 파스퇴르에 회생의 조짐이 나타나자마자 많은 소비자가 격려 전화를 했다. 긴 글의 편지를 보내온 주부들도 있었다. "파스퇴르를 믿고 최명재를 믿으며 파스퇴르 제품을 믿는다"는 게 편지의 골자였다. 저온살균우유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아는 소비자들이었다. 그 뒤에도 이른바 '쇳가루 사건' 등으로 한두 번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래도 파스퇴르가 낫다"는 소비자들의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매출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에 들어서면서 50% 이상 감소했던 매출액이 99년에는 3분의 2 수준으로 회복됐다. 이후에도 완만하지만 확실한 상승 곡선을 그려나갔다.

회사 빚을 갚는 속도도 빨라졌다. 빚의 대부분은 원유(原乳)를 공급하는 목장에 줄 돈과 각종 자재 대금이었다. 이 추세대로라면 예정했던 2003년보다 일찍 화의에서 벗어날 것같은 기대감이 생겨났다.

그러나 부도 이후의 경영 환경은 부도 전과는 너무 달랐다. 나도 달라져야 했다. 주변 사람들이 앞다퉈 충고했다.

"회사 규모가 구멍가게 수준일 때는 혼자 모든 일을 해치우는 것이 능률적이다. 그러나 수백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전국적인 판매망을 갖춘 회사라면 시스템으로 움직여야 한다. 만약 당신이 없을 땐 회사가 어떻게 굴러가겠는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창업 때부터 익숙해진 관행을 바꾸는 게 쉽지는 않았다. 부도 전에 한때 전문경영인제를 도입한 적이 있다.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에서 계열사 대표를 지낸 두 경영인을 차례로 초빙해 파스퇴르의 경영을 맡겼다. 두 번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대기업의 경영 방식이 창업주 1인지배의 중소기업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결국 내가 그들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밑받침, 즉 시스템을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남성적이고 저돌적인 파스퇴르의 기업문화에 여성적이고 합리적인 면을 가미하기 위해 아내를 경영 일선에 내세웠다. 처음엔 거절하던 아내도 나의 집요한 권유로 마침내 대표이사직을 맡았다. 나는 회장으로 물러났다. 아내는 목장 조성 때부터 나의 손발 노릇을 다했으며 파스퇴르유업 설립 후에는 감사를 맡아 회사 살림을 챙겨왔기 때문에 안심하고 회사를 맡긴 것이다. 이후 파스퇴르의 기업문화는 서서히 부드럽고 세련되게 변해갔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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