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41. 과기대 설립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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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97년 나는 새로운 구상을 했다. 민족사관국제고와 과학기술대 설립이었다.

민족사관고를 운영해 보니 외국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국제고 설립을 구상하게 됐다.

나는 미국에 있는 많은 사립고를 가봤다. 학교마다 1백명 안팎의 한국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교육제도에 대한 학부모들의 뿌리 깊은 불신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한 해 수천만원의 비용을 감수하면서 자녀를 미국의 고교에 보내야 하는 부모의 심정을 '비애국자'니 '교육 사대주의자'로 매도할 수만은 없다. 국내 교육 수준을 끌어올려 고교생 유학의 원인을 없애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처방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대는 민족사관고 운영의 연장선상에서 꼭 세우고 싶었다. 민족사관고 졸업생들이 대학에 가서 민족사관고 교육 목표와 멀어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나는 민족사관고 교육 목표를 대학에서 완성해야 한다는 절실한 필요성에서 과학기술대 설립을 추진했다. 과기대 청사진을 만들기 위해 97년 여름 나는 미국에 갔다.

포항공대 K교수의 도움으로 MIT와 하버드 .프린스턴대, 그리고 벨연구소 등을 찾아갔다. 첫 방문지인 MIT에서 나는 귀한 사람을 만났다. MIT 기계학과장인 서남표 박사였다. 서박사는 레이건 정부 때는 백악관에서 대학 행정 책임자로 일했던 유능한 인물이었다.

"미국 대학에 들어오는 한국 학생들을 보면 수학을 아주 잘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입학 때 일류이던 수학 실력이 2학년에 올라가면 이류로 떨어지고 3학년이 되면 삼류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는 한국 고교 교육의 맹점입니다. 혹시 민족사관고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민족사관고 교육 방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서박사는 내 말을 들으면서 허점을 지적하고 보완책을 제시했다. 귀국한 뒤 나는 서박사의 조언에 따라 우리나라 고교 교육의 맹점 중에서 민족사관고가 답습하고 있는 것을 보완하는 몇 가지 장치를 마련했다. 예를 들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사이에 전.후기 합쳐 모두 네 차례의 수시평가를 실시키로 했다. 학기 중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도록 한 장치였다. 시험기간에 '반짝공부'로 성적을 올리는 일이 불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또 이 기록을 통합 파일에 남기도록 했다. 이 같은 방법은 이미 교육부에서 권장하고 있었다. 다만 일반 고교에서는 실시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서박사의 조언에 따라 시행한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 대학에서는 통합 파일을 요구하기 때문에 세계를 지향하는 민족사관고로서는 당연히 풀어야 할 과제이기도 했다.

서박사는 과학기술대 청사진에 대해서도 중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대학을 세운다면 서박사 같은 훌륭한 해외 인재들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와 파스퇴르유업 부도로 그 꿈이 좌절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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