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44. 민사고 폐교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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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내가 부도 난 파스퇴르유업의 경영에서 물러나있던 넉달 동안 민족사관고는 '공황' 상태였다. 기숙사 난방은 고사하고 교사.학생들에 대한 급식을 걱정할 지경이 됐다.

파스퇴르 임직원들은 "우리가 굶더라도 학생들에게 난방과 식사를 지원하겠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이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겉으로는 흔들림 없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도 속으로는 학교가 문을 닫을지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이 때문에 학교 분위기는 천근의 무게로 가라앉아 있었다.

이런 가운데 29명의 교사 모두가 "학교가 정상화될 때까지 월급을 받지 않고 가르치겠다"고 결의했다. 교사 급여가 학교 운영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사들의 결의는 학교 살리기에 큰 도움이 됐다. 학부모들도 동참했다. 1인당 90만원씩 내 '학교 부도' 위기를 넘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7년 여름, 나는 재미동포 2세 자녀 4백명을 고국에 초청했었다. 그들은 민족사관고에서 묵으며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배우고 고국 문화를 탐방했다. '조국 알리기' 캠프다. 이후 이 행사는 매년 여름 민족사관고에서 열리고 있다. "아이들이 한국어을 전혀 못하고 미국인으로 행동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탄하는 많은 재미동포들 위로하기 위해 만든 행사다.

파스퇴르 부도와 민족사관고의 어려운 사정이 미국에까지 전해지자 아이들을 조국 알리기 캠프에 보냈던 부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구심점이 '라디오 코리아'였다. 워싱턴DC에 살고 있는 한 부모의 제의로 시작된 '민족사관고 살리기 모금 운동'은 순식간에 미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50달러, 1백달러씩 내는 부모들이 줄을 이었다. 1만3천5백달러가 모였다. 그해 5월 8일 이장희 라디오 코리아 사장이 이 돈을 전달하기 위해 민족사관고를 찾아왔다. 이 돈은 실제 금액의 몇 십배에 해당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나를 비롯, 교사.학생.학부모 모두에게 학교 회생의 자신감과 용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련 속에서도 학교에 남아 있던 1기생 11명 중 네명이 한국과학기술대(KAIST)에 조기 진학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특수목적고를 제외하고 일반 고교에서 2학년 과정을 마치고 곧장 KAIST에 진학한 첫 사례였다.

파스퇴르 부도와 민족사관고의 생존 여부가 불투명했던 98년 7월 아이슬랜드에서 열린 국제 물리올림피아드에서 2학년 허동성군이각국에서 온 과학 영재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금상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생활교육관 앞에 있는 노벨상 수상자 좌대로 달려갔다. 지금은 비어 있는 좌대이지만 머잖아 이 좌대에 우리 학교 출신 노벨상 수상자의 흉상이 올려질 것이다. 허군의 수상은 노벨상으로 가는 길의 출발 신호였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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