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征’의 탄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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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26면

1935년 10월 산베이(陝北) 지역에 도착한 중앙홍군 주력부대. [김명호 제공]

중국을 연상시키는 많은 용어 중 하나가 장정(長征)이다. 흔히 앞에 대(大)자를 붙여 민주 대장정, 골프 대장정, 선교 대장정, 통일 대장정, 민심 대장정 같은 말들을 비장한 어조로 쓴다. 그러나 장정은 원래 있었던 단어도 아니고 중국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도 아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6>

1934년 10월 중국인민해방군의 전신인 중국농공홍군(農工紅軍)은 장제스가 지휘하는 국민당 대군의 포위 섬멸작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시(江西)성 루이진(瑞金)의 중앙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대규모 군사이동을 감행했다.

도주나 다름없는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격조 있는 작전 명칭이 있을 리 없었다. 처음엔 “장거리 행군을 겸한 전투” “전략적 이동” “원정(遠征)” 등으로 부르다가 홍군 총지휘부의 지시로 “서정(西征)”이나 “포위 돌파(突圍)”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35년 5월 중앙홍군은 다량산(大凉山)의 소수민족 지구에 진입했다. 홍군의 총사령관 주더는 농공홍군에게 보내는 포고문에서 “홍군의 만리 장정은 가는 곳마다 기세가 대나무를 자르는 듯하다(破竹之勢)”며 처음으로 “장정”이라는 표현을 썼다. 새로운 단어가 탄생한 것이다.

한 달 후인 6월 12일에는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이 쓰촨(四川)성 서북지역에서 회합했다. 홍군 총정치부 선전대는 경축 노래를 만들며 가사에 “만여리 장정”이라는 말을 삽입했고, 8월 5일 개최된 중앙 정치국 회의는 홍1방면군(中央紅軍)의 “1만8천리 장정”을 중국 최초의 위대한 사업으로 결의했다.

35년 10월 홍1방면군의 주력부대가 산시(陝西)성 북부에 도착했다. 11월 홍1방면군 전체 간부회의에 참석한 마오쩌둥은 “루이진을 출발해 367일 동안 적과의 전투가 35일, 행군이 267일, 휴식은 65일을 넘지 않았고 2만5천리를 행군한 부대도 있다”며 “이는 과거 그 어디에도 없었던 장정”이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중국공산당중앙과 중화소비에트공화국 명의로 발표하는 선언문 등에 “2만5천리 장정”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두 달 후 마오가 글을 통해 장정의 의의를 확실하게 규정하자 당사(黨史)나 군사(軍史)는 ‘장정 시기’를 따로 설정하게 되었고 장정은 전투를 겸한 행군만이 아닌 함축성 있는 역사 용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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