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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첫 도입 ‘상대 지명제’ 숱한 화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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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번 대회에 처음 도입된 상대지명제가 미묘한 파장과 함께 숱한 화제를 낳았다. 대개 10~20대 초반의 젊은 기사로 구성된 예선 통과자 16명이 시드 16명을 상대로 지명권을 행사하는 것인데 호기롭게 강자를 지명하면 다음 판을 기약하기 어렵고 약자로 분류되는 노장을 지명하면 ‘패기 부족’ 소리를 각오해야 하는 분위기. 첫 번째 지명권을 행사한 허영호 6단은 일본 기성 야마시타 게이고 9단을 호명했다. 명분과 실리를 조화시킨 고심의 첫 수.

 일본의 황이주 7단이 이창호 9단을 지명했고 중국의 장웨이 5단이 이세돌 9단을 일찌감치 지명했다. 장내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반면 한국의 젊은 기사들은 전년도 우승자 창하오 9단과 중국 1위 구리 9단을 끝까지 지명하지 않았다. 대신 강동윤 7단(서봉수 9단), 송태곤 8단(조훈현 9단), 김기용 3단(조치훈 9단), 한상훈 초단(마샤오춘 9단) 등의 선택에서 보듯 일단 명분보다 실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실 이번 대회에서 조-조-서는 ‘3로(老)’ 소리를 들어야 했고, 중국 총감독인 마샤오춘까지 포함해 ‘4로’라 불리기도 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들이 모두 한국 기사들의 지명을 받은 것이다. 이리하여 14번째 김혜민 4단이 창하오 9단을 선택하게 됐고, 15번째 홍성지 5단이 백홍석 5단을 고른 뒤 마지막 남은 구리 9단은 결국 조혜연 7단의 몫이 되었다. 한국기원 한상열 사무총장은 이날 밤 중국 취재진과의 자리에서 “한국 젊은 기사들이 현실적으로 지명했다. 중국의 두 강자를 모두 여자 기사에게 넘긴 결과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4일 오전 10시 32강전 대국이 개시됐다. 노장을 선택한 기사들 중에선 송태곤 8단만이 패배했고 나머지 3명은 모두 이겼다. 대신 이창호-이세돌을 선택한 기사들은 모두 졌다. 현실은 역시 냉정했던 것. 32강전에서 한국은 19명 중 12명이, 중국은 9명 중 4명이 살아남았고 일본은 고노린 9단이 박정환 2단에게 지며 4명 모두 전멸했다. 일본 네티즌들은 “1회전 전멸이라니. 일본 기사들이 밥 취급을 당하는 것이 슬프다”며 굴욕감을 토로했다. 조치훈 9단을 포함한 일본 기사들과 취재진은 이날 새벽까지 통음한 뒤 곧바로 떠났다. 유성에 운집한 60여 명의 프로기사 사이에서는 상대지명제에 대한 찬반이 반반으로 갈렸다. ‘신선한 기획, 재미있다’는 쪽과 ‘선수를 고문하는 제도, 품위에 문제가 있다’는 반론이 팽팽했다. 마샤오춘 9단은 “여자에게 먼저 지명권을 주자”고 제안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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