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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찾기>작가가 쓰는 사회면-배암이 묵은 허물을 벗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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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산(野山)스님은 그의 토굴을 찾아 온 두 사제의 얼굴을 살폈다.지난 겨울에 다녀갔던 운산(雲山)수좌와 석산(石山)수좌,그들의 표정에 자못 비장감이 서려 보였다.
『올 봄은 조용히 넘기려나 싶었는데 무슨 곡절이 생겼나.』 야산은 어떤 상상이 떠오르려는 것을 깊은 한숨으로 날려 보내며물었다. 『자네들이 불쑥 나타난 걸 보니 종문에 무슨 바람이 일었는가?』 『종산(宗山)사형의 서찰을 가지고 왔습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운산이 수좌복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야산앞으로 내밀었다.『나는 종문과 인연을 끊은 지 오랜데 종산사형께서 무슨 서찰을 보낸단 말인가.』 『읽어 보시면 아십니다.』『읽어 볼 필요 없이 그대로 가지고 돌아들 가게.』 『스님,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라는 말씀만 하실 때가 아닙니다.』 『무슨소린가.그건 성철 같은 허깨비가 남긴 말이지,내 말이 아니야.
』 퉁방울 눈에 매부리코를 가진 석산이 운산의 손에서 봉투를 낚아챈 다음 서찰을 꺼내 야산 앞에 펼쳐 놓으며 철성을 터뜨렸다. 『그러니 스님께서 면벽을 거두시고 하산을 하셔야죠.면벽을하시려거든 탐욕에 눈이 어두워 엉덩이를 까내리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회색 아귀들 곁에서 하시라는 말씀입니다.』 야산은 그제서야 서찰에 눈길을 모았다.
-조계종단도 마침내는 봄을 맞게 되는가 보오.하지만 한바탕 불장난은 피할 길이 없을 것 같소.그러니 야산이 곁에 있어 줘야 된단 말이오.사제들과 함께 하산하리라 믿으오만,그렇지 못할경우 명일 오후라도 꼭 대좌할 수 있기를 바라오 -.
종산의 달필이 묵향을 뿜어내고 있었다.야산은 뭉클한 충동을 일으켰다.
「종산을 도와서 불법을 바로 세우는데 일조를 해야지」.
야산은 눈을 지그시 감고 내공으로 생각을 응축시키며 3년전 주지직에서 쫓겨났던 아수라장을 떠올렸다.
한밤중 몽둥이를 든 괴청년들이 대중방을 점거했다.힘깨나 쓴다던 승려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대중방에 꿇려 있고,나이든 스님들과 사미승들이 한쪽에 몰려 앉아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야산은주지로서 소임을 제대로 못한 점이 무엇인가를 스 스로 묻기 위해 대중방 불전을 향해 오체투지로 삼배의 예를 올렸다.주지 발령 3개월,그새 사찰재산을 횡령할 세월은 아니었다.복원과 증축의 설계도면을 만드느라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한 불사 다짐이 죄라면 이대로 내쫓길 수 없다는 생각에 야산은 승복을 벗고절 마당으로 뛰쳐 나갔다.
『너희가 승려가 아니기 때문에 나 또한 승복을 벗고 속인으로돌아갈 수밖에 없다.어느 놈이든 덤벼라!』 청년시절 태권과 검도 수련을 쌓은 야산의 손에 어느새 장죽이 들려 있었다.
청년들은 대중방만 점거하면 주지는 저절로 무릎을 꿇으리란 예상이 깨지자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킬킬거렸다.
『지가 무슨 소림사 주지라고.』 거드름을 피우며 괴청년들이 대중방을 나와 야산을 겹으로 둘러싸고 기회를 엿보았다.그야말로야산은 일당백이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태에 이르렀다.
극과 극이 만난 진공상태,불퇴전의 화신으로 굳어 있는 야산 앞에 20여명 깡패들도 숨을 죽였다.그때 야산의 입에서 그 정적을 깨뜨리는 말이 튀어 나왔다.
『시자 도일은 듣거라.경내 소등스위치를 내려라!』 마치 그 하명을 기다렸다는듯 소등스위치가 내려지고 경내는 암흑의 수렁이되었다. 야산은 암흑 속에서 또다른 암흑의 원을 향해 찰라적인빛을 뿜듯 장죽을 휘둘렀다.가위 손오공이 나타났는가 싶은 일방적인 공격은 잠깐동안 이었다.
『도일아,이제 소등스위치를 올려라!』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장이 불빛 속에 드러났다.20여명 거구의 깡패들이 반수 이상 넘어져 버그적거리며 신음을 토하고 설맞은 나머지 대여섯 명이 퇴로를 찾느라 허둥댔다.야산은 그중 세 놈의 장딴지를 향해 정확히 장죽을 내리쳤다.
허방을 내딛듯 허공을 거머쥐고 세 놈이 거꾸러지자 앞선 세 놈은 천방지축 어둠 속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리고 보름인가를 버티다 야산은 옆구리에 칼을 맞고 쓰러졌었다. 「내 어찌 그 아수라장으로 다시 발을 들여놓는단 말인가.
제발 불타여,그 아수라장만은 피하게 하소서.」 야산은 자리에서일어나 문갑 위에 놓인 오동나무 상자를 열고 삭도(削刀)로 물려받은 대팻날을 꺼내 들었다.
『자네들 이것이 뭔가?』 운산이 앉은채 합장을 하고 공손히 상체를 굽혀 예를 올렸다.
『큰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전에 물리신 법도(法刀)입니다.』 『그때 운산은 사미였지?』 『예,큰스님 입적 당시에 시자직분이어서 법 물림을 곁에서 소상히 지켜 보았습니다.』 『그렇다니 묻겠네.우리 문중의 법통이 누구에게 있다고 보는가?』 ***운 산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했다.그러자 곁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석산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야 종산사형께 있습지요.』 『그래,그렇게 단언할 수 있다면 좀더 소상히 이르게.』 『종산사형께서 큰스님의 의발(衣鉢)을 물려 받은 이치에 따라 그렇습니다.』 야산은 쓴 웃음을 애써 감췄다.
『그때 자네는 행자였지.내 기억이 맞는가?』 『그렇습니다.전과자로 몸을 피하고 있을 때 큰스님께서 저를 거두어 주셨습니다.』 『그럼 자네를 행자로 거두자고 큰스님께 아뢴 게 누군 줄아는가?』 『글쎄요….』 『종산사형이 아니라 날세.』 『금시초문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시주밥을 지금까지 먹었다니 참으로다행일세.』 『무슨 뜻입니까?』 『앞으로 시주밥을 화두로 삼게.』 『제 근본이 시주밥이나 축내는 축이라는 말씀입니까?』 『화두를 붙들었으면 참구를 하시게.』 석산은 입맛이 쓴지 침을 모아 꿀꺽 삼키고 퉁방울 눈을 부릅떴다.한 방 맞았으니 돌려주겠다는 표정이 분명했다.
『야산사형의 법도도 이젠 녹이 잔뜩 슬었다더군요.』 예상했던말이 나온다 싶은지 야산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 담겼다.
『시험해 보시게.』 야산이 대팻날 삭도를 석산에게 불쑥 내밀었다. 『자,내 머리를 밀어 주게.안그래도 자네들이 안 왔으면오늘 삭발을 하려던 참이었네.』 ***당 돌하게 석산이 삭도를받아 들었다.일이 묘하게 뒤틀렸다.운산이 대야에 물을 담아 들여오고 삭발이 시작되었다.삭도는 거침없이 시원하게 머리를 밀어냈다. 「어,시원타」.눈을 지그시 감은 야산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법 한데,웬일로 전혀 뜻밖에 야산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이 무슨 낙루의 법문인가?」 마지막 골 다듬기만 남은 삭도질을 멈추고 석산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마저 끝내시게.삭도가 녹이 슬어 머리를 뜯어 먹으니 눈물이날밖에.』 이심전심에 의한 어떤 감정이 석산의 가슴을 치받았다.그 전율은 사뭇 강했다.
「젠장,시주밥을 먹으면서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석산은 아슴한 향수에 젖어들었다.한때 주먹의 힘을 빌려 세상을 살려 했던 그가 자신과 진배없는 과거를 지닌 야산에게서 느껴지는 애틋한 향수였다.
『제 용렬함에 마음이 상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삭발을 어서 마치게.자네에게 할 말이 따로 있네.』 야산에 대한 외경심,석산은 떨리는 손으로 삭발을 끝냈다.
『다 마쳤습니다.제게 하실 말씀을 하시지요.』 『그 삭도 이젠 자네가 간직하게.』 석산은 뜨악한 표정으로 야산을 바라보았다. 『어찌 제가 감히 법도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거두십시오.
』 『간직 못하겠거든 종산사형께 전하시게.』 『저희와 함께 하산하실 수 없으시단 말씀이시군요?』 『초목은 태양의 마음을 명상하기만도 바쁘다네.』 석산은 미련을 떨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법도가 제게는 너무 무거워 지금 서둘러 하산하더라도한밤중에나 본사에 도착하겠습니다.』 『살펴들 가시게.』 조계종단의 회오리바람이 광풍으로 치닫다가 마침내 잠잠해졌다.그리고 사부대중이 화합된 중풍이 서서히 자리잡혀 나갔다.
그런 어느날,야산은 산문을 나섰다.낙조 무렵 조계사에 들른 야산은 석산의 입멸 소식을 운산에게서 들었다.
『종권분규가 아수라장으로 치닫던 날 석산은 스님께서 물린 법도를 정수리에 꽂았습니다.』 종산의 입에서 무거운 한마디가 덧붙여졌다.
『우리는 석산의 죽음에서 진실을 보았다네.그 진실은 이제 우리의 것일세.』 야산은 이를 악물며 생각을 곱씹었다.
「내가 석산의 진실을 죽기까지 시험했구나」.
홀로 조계사 대웅전 뜰로 나온 야산은 빈 하늘을 향해 시선을모으고 인도의 고대「경집(經集)」한 구절을 뇌었다.
「넘쳐나는 애착의 물줄기를 남김없이 말려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저 세상까지 다 버린다.배암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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