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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뭘하십니까>5년 억류 前駐越공사 한국해음 李大鎔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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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前駐越공사 李大鎔씨(69.예비역 준장)는 매년 4월이 올 때마다 남다른 감회에 젖는다.
그에게 4월은「잔인한 달」인 동시에「환희의 달」이었다.
75년 4월30일 월남이 패망할 때 李씨는 주월 한국대사관 공사였다.그는 주월대사의 총지휘 아래 대사관 직원.한국 교민등을 안전하게 본국에 돌려보내기 위한 철수본부장직을 맡았다.사이공 공항까지 폭격당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한 사람이 라도 더 귀국시키려고 고군분투하던 그는 공산베트남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감옥에 가기 직전 다른 한국인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공산군이 나를 이북에 넘기려고 하지 않는한 자살하지 않겠다.이 말이 꼭 고국에 전해지도록 해달라.그리고 내 아이들이 대학교육까지 받도록 정부에서 배려해달라」는 두가지였어요.나 는 내 목숨도 목숨이지만 공산베트남과 북한이 협상해 나를 이북으로 압송할가능성을 제일 걱정했습니다.』 실제로 베트남측은 李씨에게「의거귀순」하라고 집요하게 설득했다.그러나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거부했다. 만 5년간의 억류기간중 82㎏이던 李씨의 체중은 46㎏으로 줄었다.
당시 朴正熙대통령의 지시로 제3국인 인도에서 그를 송환하기 위한 남북한 비밀협상이 열리기도 했으나 북한측이 『남한의 좌익사범 4백명과 맞바꾸자』는등 무리한 요구를 내세우는 바람에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79년 10.26이후의 안개정국 속에서도 李씨를 위한 송환 노력은 계속됐다.그가 가혹한 억류생활 속에서도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한 채 꿋꿋이 버티고 있다는 소식이 여러 경로로 흘러들어와 정부 관계자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기도 했 다.
이때 유대인 巨商 아이젠버그가 우리 정부를 위해 막후에서 활약한 덕분에 李씨는 마침내 조국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이 날이 80년 4월12일이었다.송환 당시 그는 1년간 병가를 얻을 정도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있었다.
우리 나이로 올해 古稀를 맞은 李씨는 1925년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났다.해방후인 46년 서울사범학교를 졸업,이듬해 고향에서 인민학교(국민학교)교사를 지냈다.그러나 점차 공산정권의 기반을 굳혀가던 북한사회의 분위기는 그의 기질과는 맞을 수가 없었다. 『각종 지시가 黨에서 떨어지는데,이를테면「김구는 장개석에게 우리나라의 광산권을 팔아넘겼으며,이승만은 철도권을 미국에 팔아먹었다」며 아이들에게 가르치라는 거예요.뻔한 거짓말을 어떻게 가르칩니까.갈등을 겪던중 친구들과「이렇게 자유가 없어서야 살 수 있는가」며 불평하고 다닌 것이 당에 흘러들어가는 바람에 보안부대에 체포됐지요.』 민청.직업동맹 등에서 자아비판을강요당하던 그는 47년 6월29일 빗속을 뚫고 고향에서 탈출했다.사흘만에 38선을 넘은 李씨는 낯선 남한땅에서 한동안 고생하다 서울 우신국민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48년 4월 그는 고심 끝에 육군사관학교에 입교(7기), 군장교로 제2의 인생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로 시작한 그의 앞길도 순탄치는 않았다.중위 계급장을 달고 6사단 7연대에서 중대장으로 재직하던중 6.25가 터졌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중 군의 일선 지휘관들이 대량 전사한 것은 잘 알려진일이다.李씨 역시 수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부상하기를 밥먹듯 했다. 낙동강 전투에선 포탄 공격을 받고 아홉군데에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그가 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받는 동안 육사 8기생이 후임 중대장으로 왔으나 곧 전사했다.중대장을 이어받은 육사 9기생도 전사했고 다시 중대장 직무대리가 된 육 군상사와육사 10기생이 차례차례 희생됐다.모두 4명의 후임자가 전사한뒷자리를 병상에서 돌아온 李씨가 또 이어받았다.
요즘 세대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당시의 참상과 생사의 엇갈림에대해 그는『오래 살 팔자를 타고 났던 모양』이라고 남의 일 말하듯 담담하게 표현했다.
1950년 10월26일 그가 중대장으로 있던 7연대 1중대는압록강까지 진격하는 기쁨을 맛보았다.평북 초산군 읍내를 통과해압록강 나루터인 新島場까지 도달한 것이다.
『얼마전 전쟁기념관에서 기록으로 남긴다고 나를 찾아왔더군요.
압록강까지 진격할 당시의 상황을 VTR로 녹화해갔지요.내가 죽더라도 그때의 일이 영원히 남는다니 큰 영광 아닙니까.』 그는6.25를 통해 충무무공훈장 3개,화랑무공훈장 1개를 받았지만『다 먼저 간 전우들 덕분』이란 말을 잊지 않았다.
80년 베트남에서 극적으로 귀환한 李씨는 1년간 쉬며 건강을회복한 뒤 화재보험협회이사장.생명보험협회장을 거쳐 89년부터 카세트 테이프 부품업체인 한국해음(주)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회사는 의약품.식료품용 포장재도 만들고 있다.서 울 본사와 경기도 광주의 공장을 바삐 오가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15일 시행된 재향군인회중앙회장선거의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아 한달여 뛰어다니기도 했다.4명의 후보가 출마한 이번 선거는 문민정부가 들어선 덕분에 사상처음 경선으로 진행된 선거였다.때문에 李씨에게 선거관리 책임이 맡겨진 것은 그 만큼 공평무사하게 선거관리를 할 것이란 신뢰를 군동료.후배들로부터 받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요즘 젊은이들은「자유의 소중함」을 너무 모르는 것같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고리타분하게만 여기고….이북의 벌목공들이 탈출 소동을 벌이고 있는데도 믿지 않으려는 사람까지 있더군요.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는 이 말과 함께『어쨌든 오늘의 한국은 기성세대가 피땀으로 이룬 것인만큼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근면함을 겸손히 배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盧在賢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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