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더 애틋하고 절절하여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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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15면

이수영 자유기고가

전설이 된 연애편지

연애를 하는데 연서를 쓰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설령 부치지 못하고 찢어버리는 편지가 되더라도 말이다. 사랑편지 모음 앞에 가장 흔히 붙는 수식어는 ‘보내지 못한’이다. 연애편지는 상대방에게도 보여주지 못할 만큼 자신 없고 남 보여주기 제일 꺼려지는 편지이지만, 모순되게도 가장 손쉽게 공개돼 많은 관심을 받고 널리 읽혀지는 편지이기도 하다. 특히 유명인의 연애편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뜨겁고, 언론과 출판업자는 쓰레기통도 서슴없이 뒤진다. 추리소설 '도난당한 편지'가 일러주는 역설. 잘 숨기고 싶은 것일수록 오히려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어야 한다.

연애편지는 특정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쓰인 글이지만 편지를 읽는 순간, 독자는 그 주인공이 되고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킨다. 편지가 문학의 한 장르로 간주되고 특히 연애편지가 서간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이유다. 엄격한 조선 계급 사회의 희생자 홍랑이 이별한 연인에게 보낸 애절한 시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밤비에 새 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그리고 도도한 유혹의 시편으로 근엄한 왕가의 남자를 뒤흔든 황진이의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는 요즘에도 즐겨 애송된다.

현대 작가들의 연애편지도 독자들과 만났다. 지난해 출간된 '작가들의 연애편지'는 아쉽게도 노골적인 스토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좋아했다는 얘긴지, 형체라도 조금 파악하기 위해서는 눈을 부릅떠야 한다. 한국문단의 대표적인 커플로 알려진 김동리·서영은 소설가 사이의 합법적 혼인 문제들을 둘러싼, 날카롭고 형식 실험적이면서도 유머가 넘치는 연애편지가 압권이다.

이와는 상반되는 상황을 담고 있는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연애편지 이야기가 애틋하다. “당신에게 고통만 주고 있는 것 같아서 괴롭습니다. 우리들 사이에 문제가 되는 것은 성적인 면이지만 당신은 저를 매우 행복하게 해줍니다. 어쨌든 우리가 바라는 결혼은 활력에 넘쳐 언제나 신선하고 자극을 주는 것입니다. 보통의 결혼처럼 박력 없고 안이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 그러한 결혼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면 얼마나 근사할까요.” 정상적인 부부 관계가 불가능할 정도로 예민한 성벽의 소설가 아내를 받아들인 남편은 출판사를 창립하고 당대 문인들과 교류 모임을 만드는 등 안정되고도 자극적인 환경을 조성하여 그녀의 재능이 꽃필 수 있도록 돕고 정신병으로 자살해 죽는 날까지 극진하게 보살폈다.

가장 미묘하고도 복잡한 스캔들에 휘말려 있는 연애편지는 세기의 사상가이자 신화적 연인이었던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 폴 사르트르의 것이다. 특이한 원칙에 근거한 50년 동반 관계의 노골적인 면모를 드러낸 편지들이 사후 공개되었는데, 두 사람이 각자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는 가운데 서로 이외의 일시적 애인들에 대해 우월감과 조롱을 함께 나눈 모습은 평범한 사람들에겐 자못 충격적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연애편지는 독일 작가 괴테가 쓴 서간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수많은 실연한 젊은이들이 베르테르를 모방해 자살을 택했으며 철학자들도 제각각 이 애절한 사랑에 대한 사색을 내놓았다. 이렇듯 사람들의 입에 더 오르내리는 것은 행복한 사랑의 편지보다는 비극적 사랑의 편지다. 금지된 사랑을 용서받고 신께 복종하자며 서로를 다독이는 12세기의 신학자이자 성직자 아벨라르와 결국은 수녀가 된 엘로이제의 서신들도 그렇고, 이루어질 수 없는 ‘불멸의 연인’에게 보낸 독일 작곡가 베토벤의 편지가 그렇다. “오, 신이여! 이토록 가까운데 이토록 멀다니, 우리 사랑은 진정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허공의 집처럼 견고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나라의 종교까지 바꾸게 만들며 새 왕비로 등극했다가 사랑을 잃었다는 이유로 천 일 만에 사형까지 당한 앤 불린이 헨리 8세에게 보낸 편지만큼 비통한 편지는 드물다. “저의 마지막 소망은 저 혼자 폐하의 노여움을 짊어지는 것이며 다른 무고한 사람들은 벌하지 말아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잠시라도 저를 좋게 보셨다면, 앤 불린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이 한때라도 즐거우셨다면 이 소원을 들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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