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과 대면협상' 초유의 언론공개로 한국 체면 구겨

중앙일보

입력

“콘크리트 벽에 갇힌 느낌이다.”“돌파구가 없다.””…”
아프간 피랍사태가 발생한 7월 하순 송민순 장관이 주재한 외교부 대책회의에서 나온 당국자들의 말들이라고 한다.

탈레반은 동의ㆍ다산부대의 즉각 철군을 요구한 데 이어 피랍 인질과 아프간 정부에 붙잡힌 수감자를 맞교환하자고 주장했다. 철군은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했고, 수감자 맞교환은 한국 정부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금세라도 인질을 차례로 처단할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7월 22일 현지에 도착한 외교부 조중표 제1차관이 이끄는 정부 대책반이 25일까지 탈레반측과 간접 접촉한 건 이런 상황에서였다. 아프간 정부 대표단을 가운데 끼고 벌이는 ‘한 다리 건너’협상이었다.

하지만 간접 협상 방식에서 탈레반의 위상 강화를 우려한 아프간 정부는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씨가 차례로 피살됐다.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은 두번째 희생이 발생한 뒤 “또다시 우리 국민의 인명을 해치는 행위가 일어난다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식 성명을 냈다.

위기에서 정부 협상팀은 직접 탈레반측과 협상을 벌일 수 밖에 없었다고 정부 관계자는 말했다.한발 한발 테러범과의 협상 속에 빠져 들어 갔다.

외교부 관계자는 “21명의 피랍 인질을 무사히 석방시키는데 작용한 대면 협상의 효과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탈레반과 직접 접촉으로 쌓인 신뢰가 인질사태 해결의 돌파구가 됐다”고 말했다.

문제는 물밑에서 철저히 비공개 형식으로 진행되었어야 할 대면 협상이 공개됐다는 점이다.

테러집단과 정부간 대면 협상이 벌어지는 것도 유례가 없는 일이지만 협상 장면이 전세계에 공개된 것은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외교 소식통은 “인질사태가 장기화하면서 CNN이나 각 국의 주요 언론을 통해 협상 장면이 공개된 것은 탈레반의 위상을 높이고 한국 정부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효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다급한 상황에서 직접 협상이 불가피했더라도 청와대 대변인이 협상사실을 공식으로 확인한 것도 부적절했다는 지적이 있다.

2004년 6월 이라크에서 발생한 김선일씨 피살 사건 때 ‘파병 철회 불가’원칙을 강조하다 비극을 맞았던 학습효과도 정부를 쫓기게 만들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로인해 조기 철군 카드를 빼든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평화유지군 파병으로 넓혀왔던 외교 지평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정용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