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사르코지 욕먹으며 친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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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다시 미국을 "친구"라고 불렀다. 며칠 전 파리 주재 외국 대사들을 초청한 자리에서다.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는 지난 두 세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하다"는 그의 말은 대사를 통해 각국 정부에 전해졌다.

사르코지의 친미 행보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미국으로 휴가를 가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점심식사를 함께했다. 대선을 앞두고 미국을 찾았고 대통령 당선 직후에도 미국과의 친구 관계를 강조했다. 모두 전임 프랑스 대통령에선 찾아볼 수 없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원래부터 친미주의자가 아니었다. 우파인 시라크 밑에서 청년 당원 회장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한 그는 미국에 배짱부리는 드골주의자로 정치를 배웠다. 파리10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학맥을 키우기 위해 시앙스포에 들어갔지만 졸업장을 받지는 못했다. 이유는 영어 과목에서 낙제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된 뒤 부지런히 미국을 찾는 이유는 뭘까.

전임자 시라크가 교훈이 됐다. 지난해 레바논 사태 당시 중동에 지분이 있다고 자처하는 프랑스는 사태 해결에 나서려 했다. 이스라엘을 조심스레 비난하며 인도주의를 강조했다. 그러나 국제 사회의 반향은 없었다. 미국이 시라크를 무시하고 이스라엘을 감싸 안았기 때문이다. 이란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의 시라크 발언 역시 미국으로부터 된서리를 맞고 흐지부지됐다. 시라크는 슈뢰더와 함께 미국에 맞서는 외교로 나름 인기를 얻었지만 얻은 게 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에서는 사르코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에 맞서는 지구상의 유일한 파워였는데 이제는 부시의 새로운 푸들이 됐다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사르코지는 우리나라에서 몇 년 전부터 유행어가 된 '자주외교'라는 말이 "반미하면 어떠냐"는 식으로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밉든 곱든 미국이 절대강자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르코지가 '뉴욕경찰' 로고의 셔츠를 입고 조깅하는 건 지난해 일본 고이즈미 총리가 멤피스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를 열창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적어도 미국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 인기몰이나 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찍 터득한 현실주의자가 아닌가 싶다.

사르코지가 욕먹어 가며 미국을 찾는 이유를 우리 정치인도 생각해 봤으면 한다.

전진배 파리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