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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시인 奇亨度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출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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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가라,어느덧 황혼이다/살아 있음도 살아 있지 않음도 이제는용서할 때/구름이여,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린/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몇 점 노을이었다/…/가라,구름이여,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이제 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그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뜨면/아아,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우리는/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89년 3월7일 29세로요절한 奇亨度시인 5주기를 맞아 그를 기리는 문집『사랑을 잃고나는 쓰네』가 출간됐다.솔출판사에서 펴낸 이 책에는 위에 인용된 시「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를 비롯해 80년에서 84년 사이에 쓰인 그의 미발 표시 16편이 실렸다.또 황동규.정현종.
오규원.신경숙.원재길씨등 14명의 시인.소설가가 奇씨와 奇씨 작품을 소재로 쓴 시.소설 14편이 실렸고 남진우.이경호.성석제씨등은 평론.연대기등을 통해 奇씨의 삶과 작품세계를 정리했다. 1960년 경기도연평에서 태어난 奇씨는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84년 中央日報에 입사,정치부.문화부.편집부등에서 일했다.중학 2년때인 74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대학시절 대학문학상인 윤동주문학상.박영준문학상을 수상한 奇씨는 85 년 東亞日報 신춘문예에 시「안개」가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4년여의 짧은문단생활중 40여편의 시를 발표하며 주요시인으로 떠오르다 요절한 奇씨는 죽은 그해와 이듬해 선후배.동료들이 엮어준 유고시집『입 속의 검은 잎』과 산문집『짧은 여 행의 기록』으로 이승에서의 아까운 삶의 자취를 남겼다.
奇씨의 시들은 어둠을 배경으로 한다.「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생애여」라는 구절이 그러하듯 그의 시들은 구름까지도 죽음으로 채색하고 있다.
그러나 황혼을 지나 정작 세계가 어둠에 잠기면 그는 그 어둠과 죽음 속에서 삶과 새벽을 희구한다.사랑도 진리도 혁명도 불순하고 뜨뜻미지근한 시대에 자신과 세계를 섬뜩하도록 철저하게 부정하면서 전혀 새로운 희망과 순수를 갈구한「쓸쓸 하고 장엄한노래」가 奇씨의 시세계였다.
奇씨가 본격적으로 시작 활동을 폈던 80년대 후반 젊은 시인들은 민중과 해체,그리고 달관으로 쏠렸다.폭압적인 정치.사회에맞서 민족.민중주의의「강령」에 따른 민중시,시적 언어나 문법등을 파괴한 해체시,혹은 현실을 떠나 영원으로 침 잠하는 달관주의 시들이 80년대 시단의 흐름을 이뤘다.奇씨의 시들은 이런 흐름들과는 달리 현실을 시적으로 부둥켜 안으며 새로운 전망을 외롭게 열어나갔다.시대와 인간 존재상황을 기이한 언어.이미지로부정해가며 도저한 부정의 행간에 희 망.순수를 숨겨놓은 순결한시들로 90년대를 향한 새로운 시세계를 열었다는게 奇씨의 시에대한 일반적 평이다.
정직성.순수성으로 한국시의 깊이와 위의를 지키려한 奇씨의 짧은 삶과 시를 시인 임동확씨는 이책에 실린 시「고의적 형벌」에서 이렇게 기리고 있다.『저항할수록 청춘의 목덜미에 파고드는 면도날들…/모든게 어둡고 흐물한 점액질의 시간,/ 초라하고 궁핍했던 공간 속으로 밀사처럼/혹은 무숙자처럼 떠다니던/너의 고의적 형벌이 낳은,/오,더는 갈데가 없는 농밀한 언어의 미로들』이라고.
〈李京哲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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