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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사람>은행 전문가 이창우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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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은행나무를 나라木으로 전국에 심는 일만이 우리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인데 다들 못알아들으니 참 속 상하네요.』눈만 뜨면하루종일「은행나무 타령」만 하는「은행나무 敎主」李昌雨씨(68.
은행나무연구원장)는 은행나무 숲속에서 살고 있었다.
경기도 용인에서 수원으로 가는 광주읍 역리 국도변 논밭 사이를 비집고 그는 남의 땅 3천여평을 전세내 7천여그루의 은행나무숲을 만들어 아예 둥지를 틀고 들어앉았다.중년의 삶과 전재산을 송두리째 털어넣어 결실이 더디기로 소문난 은행 의 수확기간을 30년에서 10년으로 단축시키는데 성공한「은행나무박사」.그는 국민들이 심어만 주면 은행나무에「돈이 주렁주렁 열릴 것」이라는 주장을 애타게 27년째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직 극히 일부일뿐.그는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남이 거들떠보지 않는 일에 빠져 거덜이 났고 울화병을 얻은 아내에게 쫓겨나 단칸방을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1백만원짜리 전세방에서 라면과 깡 통음식으로 혼자 끼니를 때워도 그는 눈만 뜨면 어김없이 은행나무 숲속 조립식 사무실에 나와 은행의 소중함을 전역에 알리느라 대답없는 편지를 하루 2백여통씩 쓰고 또 쓰는 외로운 강행군을 계속하고있다. 『은행나무는 황금의 나무,돈이 열리는 나무,구국의 나무예요.어느 땅에나 심게 해 농산물 개방에도 우리 농가가 끄떡없게 만들어야 합니다.물론 드링크제등 가공식품으로도 생산할 수 있도록 허가해야 합니다.』그는 은행나무가 가진 유효성분이 수 백가지가 돼 식품.의약품.화장품은 물론 퇴비.목재.공해방지용 가로수로 두루 쓰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68년 이후 이「신비의 나무」를 찾아 전국을 누비고 온천하에미친 사람처럼 그 신비함을 떠들고 다니다보니 어느덧 백발이 된그에게 따라붙은 이름은「白首狂夫」.
일반인들에게는 샛노란 은행잎으로 가을의 정취를 북돋우는 「추억의 나무」쯤으로 대접받는 은행나무에 「홀려」 그가 전인생을 털어넣게 된 것은 아주 사소한 일이 계기가 됐다.
42세가 되던 여름 어느날,당시 수도의과大 사무장이었던 그의눈에 은행나무 밑에 모여앉아 식사하는 학생들이 들어왔다.
그가 기이하게 여긴 것은 그늘을 무성하게 드리운 다른 나무들도 많은데 유독 은행나무 밑에만 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학생들에게 얻은 대답은 은행나무에는 벌레가 꾀지않아 앉아서 식사하기에 그만이라는 것이었다.평소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당장 도서관으로 뛰어가 은행나무에 대한 자료를 들척이게 됐고 이 나무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무릎을 치게 됐다는 것.『예부터 은행나무는 팽나무.느티나무와 함께 3대 神木으로 귀한 대접을 받아왔어요.보세요.이제 우리나라 62개 제약회사,12개 화장품회사에서 은행나무를 이용한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습니까.』 그는 은행나무가 자신의 종교요,신앙이라고 했다.그는 하늘이 은행나무를 중동의 석유처럼 한국에 내려준 것이라고 굳게믿고 있다.
은행나무가 한국.일본.중국등 아시아권 일부에서 생장하고 있는데 한국 것은 성분의 효능이 다른 나라 것의 10~20배라는 것이 그의 연구결과.
그는 은행나무가 제대로 대접을 못받는 것은 종자를 심어 은행을 얻으려면 30년이 걸리는 늦은 결실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결실을 앞당기는 일을「내가 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다.
우선 당시 서울 암사동에 자신이 갖고 있던 1천여평의 땅에 은행나무 2만그루를 심어 2년여에 걸쳐 생장 촉진,결실 단축,수분및 토지 적응검사등을 했다.이 나무들은 삽목.접목 실험과정등을 거치면서 거의 죽어버렸다.
간신히 1천여그루만 건져 70년 경기도 광주로 옮겨와 5천여평의 땅에 더욱 본격적인 실험을 계속했다.이번엔 형질이 좋은 나무를 번식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전국의 우수 樹種을 찾아 방방곡곡을 헤맸다.경우에 따라선 팔지 않겠다는 나무를 나무값의 몇배를 주고 사들였고 산골 깊숙이 박혀 있는 나무는 나무값의 수십배에 달하는 운송비를 주고 옮겨다 심었다.
이렇게 비싼 나무들도 그의 반복되는 시행착오의 연구속에 속절없이 죽어갔다.멀쩡하게 심어져 있는 나무를 뽑아 토양과 조건을달리해 심어보고 수나무를 암나무에 접목하거나 老木에 어린 나무를,한 나무에 여러 나무를 접목시키는 실험을 반 복했다.땅등 재산을 팔아 강행한 이런 실험속에 그는 거덜이 났고 이젠 팔아버려 남의 땅이 된 3천여평을 빌려 7천그루의 나무를 신주모시듯 들여다보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이들 나무 역시 모두 난도질 당해 기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는 어린 나무에 결실수 가지를 접목시켜 결국 연구 10년만에 은행나무의 수확기를 30년에서 10년 미만으로 앞당기게 됐다고 자랑했다.또 비료 조정으로 요즘 약재로 많 이 쓰이는 은행잎을 5배 크기로 키울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는 은행의 독성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실험해보기 위해 무리하게 날은행을 장기 복용,한때 자리에 몸져 눕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의 고단한 항해에 환한 햇빛이 비칠 날이 가까워온 것같다.
최근들어 제약.화장품회사들이 은행을 이용한 제품 생산에 열을올리고 있고 은행나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부쩍 늘어났기 때문. 그는 모제약회사의 광고모델로도 잠시 등장했었고 이제 일부 제약회사들의 자문에 응하는 국내 최고의「은행 전문가」로 자리잡게 됐다.
그는 비록「修身齊家도 못하는 가정파괴범」이 돼 아내에게 쫓겨났지만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며 임학을 전공한 후 일손을 돕는 두 아들(장.차남)이 있어 일생이 그리 헛된 것만이 아님을 자부하게 됐다고 했다.장남은 아버지의 주장이 결코 공허한 것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전국에 산재해 있는 우람하고 아름다운 은행나무들만을 카메라에 담아 지난 1월말 은행나무 사진전을 열기도했다. 『은행나무를 나라木으로 심자』며 목이 터져라 외치고 다니는 그를 돕기 위해 사진전과 때를 맞춰 송창식.유열.전유성씨등 일부 연예인들이 광주의 한 방앗간에서「은행나무 콘서트」를 열어 그를 격려했다.
손녀의 이름조차「은행나무에 뜻을 둔 아이」라 해 銀志라 지었다는 그는 수분 증발량 실험에 동원돼 나무 윗부분이 모조리 잘려나간 은행나무 숲속을 잠시도 떠나지 않으면서 온천하가 은행나무에 뒤덮이는 긴 꿈을 27년째 꾸고 있다.■〈高 惠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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