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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살아있다] 2. 민족사관 對 동아시아사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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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 움직임에 대해 "중화민족주의 경향이 거세지는 것 아닌가"라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중국이 최근의 급속한 경제발전에 힘입어 과거에 누렸던 지역 패권적 지위를 되찾고, 나아가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역사는 중국의 '역사 다시 쓰기'의 소재로 이용되고 있는 셈이다.

*** 한.중 민족사관 충돌 우려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시도에 맞선 한국 학계의 대응책은 주로 '한국 민족주의'다. "고구려는 중국 중화민족의 지방정권이 아니라 한국 민족사의 연속"이라는 시각이다. 단순화하자면 중화민족주의와 한국민족주의가 충돌하는 형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국내 학계에는 1990년대 말부터 '민족주의의 충돌이라는 구도를 넘어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자'는 움직임도 있어왔다. 이른바 탈(脫)민족주의적 '동아시아 사관'이다. '동아시아 담론'으로 불리던 이 같은 흐름이 최근 고구려 역사 문제를 계기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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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담론의 핵심은 "근대 민족국가가 형성되면서 만들어진 '민족'이란 개념을 민족 개념이 없었던 고대사에 적용해, 현재의 국경을 기준으로 '역사 주권'을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라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란 책으로 주목을 받은 임지현(한양대 서양사)교수는 "역사학이 국가 권력에 종속돼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현상을 벗어나 역사학의 본령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탈민족주의"라고 말했다. '너무 이상적인 주장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임교수는 "리얼리즘의 시각으로 봐도 현실적으로 우리가 중국에 이길 수 있나"라면서 "한국.중국.일본 3국이 모두 '국사(國史)'의 틀을 벗어나 함께 동아시아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이기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 한.중.일 공동 연구 나서야

한국사 분야 소장 연구자들도 대체로 "민족주의가 가진 각국 역사의 한계를 넘어서자"는 동아시아 담론의 문제제기 자체에는 공감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아직은 구체적 사안에 대한 탈민족적 대안이 형성되지 않은 단계라 뭐라 얘기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학계의 움직임과는 별도로 우리 사회의 '민족'에 대한 감정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제 식민통치를 경험했고, 아직도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런데도 민족이란 '뜨거운 감자'에 손을 대는 움직임이 이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다원화되고 있다는 조짐으로 볼 수도 있다.

고구려 문제를 주로 민족주의의 충돌이란 관점에서 조명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 "착잡한 느낌"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역사 전쟁'의 위기감을 느낀다는 한 역사학자는 "역사는 과연 인간의 삶에 유용한가 유해한가"라던 철학자 니체의 질문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고 말했다. 민족사관과 동아시아사관이 조화를 이룰 길은 없을까.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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