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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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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바르게 벌어서 바르게 쓸 때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

서울 여의도 미래에셋 빌딩의 옆 벽면에는 이런 광고 현수막이 붙어 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직접 만든 문구다. 돈에 대한 그의 철학이 그렇다고 한다.

박 회장이 미래에셋 창업 10주년을 기념해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김영사 출판)라는 책을 곧 펴낸다. 이 책에서 박 회장은 돈에 대한 철학과 투자원칙, 성공담과 함께 실패담 등을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아울러 미래에셋의 지나온 10년의 성장 과정을 설명하고 향후 10년간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부의 사회환원에 대한 진솔한 생각과 한국 금융산업의 발전 방향 등에 대한 의견도 피력한다. 미래에셋 관계자는 “회장이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책을 펴내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현재 한국 증권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힌다. 그는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 판매, 토종 해외펀드 개발 등 아무도 밟은 적이 없는 길을 걸어왔다. 투자자들의 호응은 폭발적이다. 올 들어 펀드시장에 유입되는 자금의 절반가량이 미래에셋에 집중될 정도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투자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기대가 큰 만큼 그의 어깨는 항상 무겁다.

박 회장은 이 책에서 돈을 버는 것보다 어떻게 쓰느냐에 더욱 고민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그는 “3~4년 후부터 미래에셋에서 받는 배당금 전액을 젊은 금융인재를 키우는 사업에 사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래에셋은 이미 글로벌 금융 전문가 육성을 위해 해마다 20여 명의 인재를 뽑아 아무 조건 없이 1인당 최대 5만 달러까지 지원하고 있다. 3~4년 후에는 선발 인원을 10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그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가장 뛰어난 투자”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박 회장은 이 책의 첫머리를 병상에 있는 어머니 얘기로 시작한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어머니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사석에서 털어놓은 일화 한 토막. “대학에 입학하자 어머니께서 1년 학비와 생활비를 부쳐주셨어요. 돈 관리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이었죠. 한번은 몇 달 지나지 않아 이 돈을 모두 써버렸어요. 결국 다시 손을 내밀었더니, 어머니께서 차용증을 쓰라고 하시더군요. 이자와 함께. 연말에 원금과 이자를 모두 갚았습니다. 이자 무서운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는 책에서 자신의 통찰력은 독서에서 나왔다고 밝혔다. 그는 현상 너머에 있는 진실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1급 투자자가 될 수 있다고 늘 강조해왔다. 그는 “그런 능력은 독서에서 얻었다”며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독서”라고 단언한다. 박 회장은 경영서적보다는 역사와 미래예측 서적을 좋아한다. 대학 때 박 회장은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19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그의 투자원칙인 ▶소수의 입장에서 따져볼 것 ▶균형감각을 갖고 시장을 냉정하게 바라볼 것 ▶기본에 충실할 것 등도 독서의 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말한다. “다수를 따라가면 편하지만 큰 수익은 기대할 수 없다”고. 코스피지수가 2000포인트를 넘었던 지난달 25일 박 회장은 기자에게 “지금은 낙관론이 너무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마치 곧이어 닥칠 주가 급락을 예언한 듯했다. 그러나 최근 외국인들의 파상적 매도로 주가가 폭락하자, 거꾸로 과감하게 주식을 사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외국인들이 1조원어치 이상의 주식을 순매도한 지난 16일 미래에셋은 5000억원어치의 주실을 순매수했다.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박 회장은 “증시의 밸류에이션 측면에 문제가 없다. 크게 걱정할 상황이 아니다”며 자신 있게 매수에 나선 것이다.

오늘의 박 회장이 있기까지는 부단한 학습과 연구, 그리고 고민과 실천의 연속이었다. 그는 고려대학 재학 때부터 주식을 연구하고 투자하는 데 심취했다.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85년 그는 27세의 나이에 사설 투자회사인 내외증권연구소를 서울 회현동에 열었다. 증권사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고스톱을 치던 때 그는 기업ㆍ경제 분석 보고서를 쓰는 데 땀을 흘렸다. 증권사 객장에 있는 시세 전광판이 온통 파란 불(하락)일 때 그는 있는 돈을 끌어 모아 우량주식을 샀다. 또 98년 초 외환위기 여파로 금리가 연 30%를 넘볼 때 그는 미래에셋의 운용자금 200억원을 채권에 투입, 큰 수익을 올렸다. 98년 12월 뮤추얼펀드가 허용됐을 때 대다수 증권사는 생소한 이 상품에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지만, 박 회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내 최초 뮤추얼펀드인 ‘박현주 펀드’ 시리즈를 내놓아 대히트를 쳤다.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박현주 펀드는 99년 승승장구했지만, 2000년의 IT버블 붕괴와 함께 주가가 급락세로 돌아서면서 펀드 가치가 급속히 쪼그라들었다. 많이 팔린 펀드였던 만큼 투자자들의 원성도 컸다. 이를 계기로 박 회장은 선진 금융시장에 대한 연구와 해외 진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는 곧바로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하지만 당시 증시에선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박 회장이 벤처주식 투자를 통해 정치인들의 자금을 불려주는 역할을 했고 검찰 조사가 예상돼 도피성 외유에 나섰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는 뜬소문에 불과했던 것으로 확인됐고, 그는 명예를 회복했다. 엉뚱한 소문 때문에 괴로운 나날이었지만, 박 회장의 2년간 미국 생활은 그와 미래에셋이 역경을 딛고 일어나 다시 도약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미국에서의 연구와 경험을 통해 그는 글로벌 금융그룹으로서의 미래에셋 청사진을 완성한 뒤 2002년 말 귀국했다. 그는 곧바로 홍콩과 싱가포르의 인력을 채용해 현지법인 설립을 준비했다. 아울러 중국과 인도 시장 등을 겨냥한 토종 해외펀드를 계획했다. 박 회장은 “미래에셋의 꿈은 금융의 삼성전자다. 삼성전자가 세계 최고의 제품을 수출하듯이 우리도 금융상품을 갖고 글로벌 무대로 진출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박 회장은 이번에 펴낸 책에서 “외환위기는 후진 금융에서 비롯됐다”며 “한국이 선진 금융체제를 이루지 못하면 외환위기와 같은 상황은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국민소득 3만 달러는 금융산업 발전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목표”라고 힘주어 말했다.

박현주 회장은

1958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광주일고와 고려대학을 졸업했다. 동양증권과 동원증권을 거쳐 97년 미래에셋을 창업했다. 동원증권에서 그는 국내 증시사상 최연소 지점장으로 발탁돼 전국 1위의 영업실적을 올려 유명세를 떨쳤다. 창업 10년 만에 미래에셋은 국내 최대 규모의 자산운용사를 보유하게 됐다. 아울러 생보사 인수를 통해 미래에셋을 금융그룹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탁월한 승부사다. “기회는 늘 위기의 얼굴로 찾아온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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