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부총리의 헤픈 「말값」/심상복 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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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2·21」 개각이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지면에 오르내리는 장관이 정재석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이다. 취임 다음날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질문할 틈도 주지않고 물가·공기업 민영화·민자유치 등 주요 경제현안에 대해 명쾌한 논리를 펼쳐 보였다. 기자는 장관이란 자리에 오른 사람이 그렇게 소신있게 자신의 철학을 밝히는 경우를 일찍이 보지못해 「신선한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그는 서서 집무하기,칵테일 파티식 회의,타경제부처 장관실 불시방문,서면인터뷰 등으로 연일 화제에 오르고 있다. 64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무관보다 싱싱한 사고에서 생산되는 정 부총리의 파격적 행동은 대체로 「새바람」을 일으키는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부분적으로는 희화화되기도 했다.
최근 그는 자신의 얘기가 언론에 너무 자주 등장하고,특히 본래 의도와는 달리 「새부총리가 너무 나대는 것 같다」거나 「일부러 제스처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들리자 행동반경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정 부총리를 「제약」하는 것은 이같은 「외형」이 아니라 물가문제 등 정책의 「내용」이다.
『누적된 인상요인을 계속 억누르고 있으면 가격 및 유통구조만 왜곡돼 서민들의 피해가 커진다』며 공공요금의 과감한 현실화방침을 밝힌 이후 다른 물가까지 덩달아 오르자 몹시 난처한 지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요즘엔 밤잠도 제대로 못자 55㎏선을 유지해오던 몸무게가 조금 줄기까지 했다는 것이 주위의 귀띔이기도 하다. 무엇이 의욕적인 경제부총리를 3주밖에 안돼 이같은 곤궁에 빠뜨렸을까.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일부에서는 부총리 자신의 말이 너무 앞섰기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공공요금 현실화에 대한 강한 소신은 7일 기자실과의 이례적인 「서면인터뷰」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낮췄다. 서면인터뷰 형식도 자신이 계속 언론에 부각되는 것으로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해석된다. 취임직후 특정 국을 거명하며 폐지방침을 「3∼6개월 앞서」 미리 밝힌 것도 조직의 장으로서 다소 성급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같은 아쉬움은 경제기획원 직원들이 정 부총리에게 처음 보였던 반응에서도 나타난다. 지난 연말 기획원 종무식에서 한 사무관은 부총리 취임이후 며칠간 느낀 자신의 심경을 『술취한채 사막을 걷는 기분』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공무원들의 낡은 사고와 안일한 자세를 깨는 일엔 찬사를 보내지만 말 보다는 고민이 앞서야 한다는 바람을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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