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성] '거세된 희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2면

거세된 희망/폴리 토인비 지음/이창신 옮김, 개마고원, 1만5천원

빅토리아풍의 고급 주택에 살던 50대 중반의 중산층 전문직 여성이 어느날 런던의 대표적인 빈민촌 임대주택으로 이사한다. 회사 차와 휴대전화, 업무추진비, 그리고 근사한 식당에서 보내는 여유로운 저녁시간은 이삿짐에서 제외된다.

영국 유력 일간지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폴리 토인비(사진)의 빈민 체험 일지 '거세된 희망'은 이처럼 욕망의 '거세'로 시작한다. 그녀가 2002년 봄 종교단체의 권유에 따라 시간당 4.1 파운드(약 7천6백원)의 최저임금에 의지하는 생존실험에 뛰어든 것이다. 병원 잡역부.빌딩 청소원.빵공장 노동자.텔레마케터.간병인.급식보조원…. 체험을 마친 그녀는 빈곤의 굴레에 갇혀 있는 저임금 노동자의 처지를 대변한다.

"밑바닥 소득층의 실질임금은 30년 전과 다름이 없거나 오히려 더 떨어지는 수준이다. 저소득층이 늘 밑바닥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다."

토인비는 30년 동안 국민소득은 두배로 늘었지만 병실보조원의 경우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실질임금은 주당 36파운드가 줄었다는 것을 계산으로 보여준다. 1970년 비누공장.빵공장.병원에 위장 취업해 '노동하는 삶'이라는 책을 썼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녀가 다시 접한 저임금 노동 환경은 더 끔찍했다. 노동자들의 일에 대한 자부심은 확연히 줄었고 해고의 불안은 커졌다. 계약직을 파견하는 용역회사는 횡포를 부리고 정규직 노동조합은 밑바닥 노동자를 외면한다.

토인비는 30년 전 8명에 한명꼴이던 대학 졸업생이 3명에 한명으로 늘었지만 새로 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중산층의 그리 똑똑하지 않은 아이들일 뿐 저소득층의 자녀는 아니며, 중산층 젊은이와 노동자 계층의 젊은이가 결혼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고 현실을 고발한다.

그녀의 대안은 '노동의 값'을 크게 올리는 것이다. "노동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하자"는 주장이다. 최근 경제학자들의 연구를 인용해 '최저임금선을 높게 잡으면 기업가들이 고용을 기피해 실업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역설하기도 한다.

책에는 50대의 중년 여성이 시간당 4.1파운드라는 최저임금으로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가 묘사된다. 싼맛에 산 신발에 참지 못할 고통을 느끼고, 3파운드짜리 두통약을 사는 것에도 망설인다. 물을 섞은 주방세제를 샴푸로 썼지만 3파운드짜리 포도주를 마실 여유도 없다.

저자는 위장 취업에 얽힌 일화들도 소개한다. 외교부의 어린이집에 일용직으로 취업했을 때에는 평소 안면이 있는 고위 관료들을 피해다녀야 했으며, 외무장관 관저 청소부로 취직하려다 신원조회에서 신분이 드러나 스파이 침투를 시도한 혐의로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된 일도 있었다.

"실험 기간에 사실 엄청난 빚을 졌고, 가끔 식구나 친구와 외식을 했으며, 주말 밤에는 원래 살던 집에서 자는 편법을 썼다"고 고백하는 토인비는 "(최저임금으로 생활하는) 런던은 즐거움이나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비참하고, 지루하며, 빈곤한 도시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자 내가 저곳이 아닌 이곳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하는 안도감이 밀려왔다"고 덧붙인다.

번역본 편집자는 책 중간중간에 한국의 저임금 노동자 관련 통계를 넣었다. 이에 따르면 한국에서 최저임금 생활 체험을 해보려면 토인비보다 몇 배의 고통을 감수할 각오를 해야한다.

이상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