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조 신농정」 시위를 보는 마음(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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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근조 신농정」 집회가 서울역앞에서 열렸고,종로 파고다공원까지 이르는 시위로 이어졌다. 그러나 3만여 시위대는 질서정연한 대오를 지었고,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였다. 최루탄도 없었고 화염병도 없었다. 사안으로 치면 당장 농민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고 우리 농정이 휘청거리고 나라경제가 어찌 될지 기로에 서있는 시점에서 이해당사자들이 벌이는 시위였지만 이들은 의연하고 근엄했다.
농민·사회단체·대학생들로 구성된 이들 시위모습은 우리의 쌀과 농민의 문제가 진실로 사망직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애절한 안타까움을 서울 도시인들에게 설득력있게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시위자세는 시위문화의 새로운 전형을 보이면서 다수를 향해,여론을 향해 무엇을 호소하고 어떤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해 나가야 하는가를 모범적으로 보여준 사례이기도 했다.
「근조 신농정」 시위 한복판에서 우리는 시위 군중의 강한 분노와 깊은 불안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지금껏 개방불가만을 떠벌려 놓다가 지금 와선 아무런 대답이 없는 정부에 대해 강한 분노를 나타내면서 농사지어 살 수 없는 내일에 대해 깊은 불안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분노와 절망을 삭이면서 시종 엄숙하게 집회와 시위를 벌인데는 이 분노와 불안을 농민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으로 확산하자는데 그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할 일은 무엇인가. 이 분노와 불안을 어떤 과정을 거쳐,어떤 대책을 마련해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폭넓은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쌀개방 협상을 둘러싼 무책·무소신을 변명이나 침묵만으로 호도할게 아니라 납득하고 수긍할만한 절차 설명이 자세하고도 설득력있게 제시돼야 한다.
배신에 대한 분노란 일시적일 수 있지만,농민들의 살림살이는 어떻게 되느냐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일시적 보상으로 어물쩍 넘어가지 않고 항시적이고 구조적인 농민 살리기 대안이 제시되어 이들의 불안을 근원적으로 해소하는 정부안이 곧 제시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안과 해결책이 그렇게 쉽게,빠른 시일안에 마련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많은 논리와 토론이 있어야 할 것이고,그만큼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와 토론과정을 참지 못하고 불쑥불쑥 과격시위가 계속되면 이는 곧 나라의 장래를 망치는 또다른 소요와 혼돈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근조 신농정」 시위가 보인 절도 있는 시위모습은 우리 농정에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정부와 함께 쌀문제 해결책을 같이 논의하는 자세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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