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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내각제싸고 權府게임 全씨.盧씨 同床異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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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우리 憲政史에서 헌법개정은 통치권자와 후계자간의 미묘한 권력게임 측면이 있었다.
권력인계.인수문제를 놓고 두사람간의 정치적 이해가 다르면 개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개의 경우 집권자는 개헌을 통해 사후보장문제를 해결하려했고,후계자는 전임자의 영향력행사 가능성을 한사코 경계했다.물론 여기엔 야당의 반대와 여론의 향방이 배후에서 작용했다.
6共시절 3당통합후 盧泰愚대통령과 金泳三民自黨대표사이에 있었던 갈등은 가장 노골적인 것이었고 실은 5共시절에도 내각제 개헌을 놓고 全斗煥대통령과 盧泰愚民正黨대표간에 미묘한 시각차이가있었다. 크게는 全斗煥정권의 개헌의도가 불순한 것으로 비춰졌고대통령을 내손으로 뽑겠다는 국민의 열망이 워낙 커 주저앉고 말았지만 권부내부에서도 내각제에 소극적인 세력이 적지않았고 그것이 추진의지를 약화시킨것 또한 사실이었다.全대통령은 8 6년부터 내각제개헌을 추진하다 여의치않자 87년 4.13호헌선언을 했고 그것이 다시 야당과 재야및 국민다수를 자극,6.10항쟁을불러일으켰다.끝내는 6.29란 항복을 통해 대통령직선제를 받아들이고 말았지만 全대통령의 내각제는 만신창 이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盧대표는 어떤 심정이었으며 어떤 태도를 취했었던가.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관련당사자들이 명쾌한 설명을 한적이 없다.
5共의 내각제개헌은 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全대통령이 내각제에 체중을 실어 들고나온 것은 86년 유럽방문이후였다.4월5일부터 16일간 유럽순방중 그는 내각제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마침 퇴임을 준비하기 시작한 때라 그는 방문국의 헌법제도에 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귀국하자마자 그는 내부적으로『우리의현행 대통령선출방식이 외국에서 비판대상이 될수 있다』며 내각제를 찬양했다.
그에 앞서 청와대와 民正黨은 金泳三.金大中씨가 李敏雨新民黨총재를 앞세워 밀어붙이는 직선제 공세에 계속 밀리고 있었다.
야당이 1천만 개헌서명운동에 착수하면서 정국은 급랭했고 全대통령으로서도 계속 묵살만 하고있을수 없는 처지였다.全대통령은 86년2월24일 李敏雨총재.李萬燮국민당총재(現국회의장),그리고盧대표를 함께 청와대로 불러 개헌문제에 대해『8 8년 올림픽이끝난뒤 89년에 가서 국민의 뜻에 따라 해야한다』고 밝혔다.회담후 許文道정무1수석은 全대통령의 발언이『89년이후 개헌』을 뜻한다고 단정적으로 기자들에게 설명했다.그러나 許수석의 이같은설명은 全대통령의 본뜻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全대통령의 얘기는 현행헌법으로 차기대통령을 뽑아 올림픽을 치른뒤 개헌문제를처리하자는 것인데 許수석이 89년 개헌이라고 시점을 못박아 혼선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당시 청와대공보비서관 金聲翊씨가 쓴『全斗煥 육성증언』에 따르면 全대통령은 개헌에 관한 말이 속뜻과 다르게 전달된데 대해 불쾌감을 토로했다고 한다.『許수석이 89년에 직선제개헌을 하면내가 다시 대통령에 출마할수 있지않느냐는 충성심 에서 언론에 잘못 브리핑한 모양이다.그래서 야당에 발목이 잡혔다.』 許수석의 배경설명은 야당에「89년 개헌」의 음모설을 다시 물고 늘어지게 하는 허점을 보였고 야당은 더욱 거세게 직선제를 요구했다.이 상황속에 유럽에 다녀온 全대통령은 내각제의 장점을 내세우면 야당의 공세를 차단할수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다시 3당대표회담(4.30회동)을 열어『여야가 국회에서합의하면 임기중 개헌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한발 물러섰다.이로부터 근1년간 지루한「합의개헌」론이 정국의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그가 갑자기 내각제에 매력을 가졌던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정치발전측면에서 내각제의 장점인 대화정치 정착.권력분산.책임정치구현등을 내세웠지만 그의 진짜 의도는 권력이양후의 보장 문제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2.12총선에서 양金씨 에게 혼나면서 그는 퇴임후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대비했다.그는 12.12와 5.17 光州문제에 늘 부담을 느꼈다.그래서「평화적 정권교체를 하되 권한을 분산해서 위험부담을 줄인다」는 것이 그를 압박했다.아무리 생각해도 양金씨를 상대하는 대통령직선제에는 자신이 없었고 강한 대통령이 후계자로 등장하는것이 싫었다. 全대통령으로서는 후계자가 대통령인지 국무총리인지 분간할수없는 내각제가 그럴듯하게 보였다.당시 全대통령의 심경에 대한민자당의원 Q씨의 증언.
『85년후반들어 全대통령은 朴正熙대통령이 유신을 한것과 李承晩대통령이 3선개헌을 한것을 퇴임후 보복이란 차원에서 따져보기시작했어요.아무리 단임을 약속했지만 퇴임후 부닥칠 정치보복을 생각하면 버마의 네윈이나 중국의 鄧小平처럼「섭정」 에 유혹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겠지요.그의 마음이 이렇게 흔들리는 것을 눈치챈 참모들이 그럴듯한 보고서를 만들거나 건의를 하기 시작했지요.』 6共초 국회청문회에서 질타 받은「88년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 준비연구」라는 섭정 시나리오가 그 대표적인 예다.이 문서를 만든 鄭九鎬씨(前청와대대변인)는『나의 독단으로 작성했고청와대에 보고하지도 않았다』고 했지만 그가 全대통령의 고민을 알고 충성심을 발휘했던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許文道정무1수석은 노골적으로『盧泰愚는 보복한다.盧信永도 믿을수 없다』는 말을 하고 다녔고 이런 말은 全대통령 귀에도 들어갔다. 청와대는 내각제가 갖고있는 여러 장점을 잘 홍보하면 양金씨도 어쩔수 없을것이라는 나름의 판단도 했다.5.17이후 金泳三씨도 한때 내각제찬성론을 편적이 있었고 金大中씨는 미국망명동안 대통령직선제를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힌적이 있었기 때문이다.야당이 일단 반대하고 있지만 현행이냐,내각제냐를 놓고 택일하는 상황으로 몰고가면 타협의 돌파구가 마련될수도 있을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숨은 의도에 촉각도 그러나 이런 계산과 의도로 내세운 내각제는 권부내부에 민감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全대통령의 내각제의도에는 권력인계와 관련된 모종의 복선이 숨어있을지도 몰랐기때문이다.盧대표를 제치고 다른사람을 후계에 지명하려는것은 아닐까,정권교체 후에도 영향력행사를 위해 내각제를 내놓은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나왔다.내각제 아래서는 후계자의 의미가 변질될수밖에 없고 원내세력분포에 따라 후계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당시 盧대표는 당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기껏 몇명의 전국구 의원들이 측근에 포진하고 있었다.
야당도 마찬가지였다.李敏雨총재는 국회 대표연설에서『내각제개헌구상은 집권당의 당헌에 따라 1인장기독재라는 최악의 상태마저 가능하게 할 위험이 있다』고 공격했다.이에대해 盧대표와 가까웠던 李春九민정당총장은『당총재와 총리를 겸직 또는 분리시킬지는 내각제개헌이 이룩된 연후에나 검토할 문제』라고 말해 적극적으로해명하려 하지 않았다.당시 全대통령이 올림픽때까지 집권을 연장할지 모른다는 관측도 있었고 그렇게 하라고 부추기는 사람도 있었다.사마란치 IOC위원장도 그중 하나였다.
그 무렵 全대통령은 사석에서『朴대통령도 육군대장 예편에 대통령,나도 육군대장 예편에 대통령,만약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盧대표가 대통령을 하면 국민이 질색할 것 아닌가』라고 얘기한적이 있었다.이것이「민간인 후계자설」을 낳았다 .정계 일각에서는 全대통령이 대통령을 내놓은 뒤에도 막강한 권한을 가진 민정당총재로 건재할 것이란 얘기가 나왔다.그렇게 되면 대통령은 盧信永.
金相浹.南悳祐.盧泰愚중 한명이,총리는 盧泰愚.張世東중에서 되리란 것이었다.
***25面에서 계속 이런 추측과 풍문속에서 盧대표는 독특한스타일로 자신의 속마음를 내비치지 않았다.그가 7년임기 현행헌법의 대통령을 원했음은 당연한 것으로 보였지만 2인자로서의 굴신자세는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내각제론자로 적절히 변신해가는 것 같았 다.열심히 지구당대회에서 내각제개헌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이런 태도는 독특한 그의 처세술에다 내각제하의 후계자에 대한 정치적 계산 때문으로 보였다.『야당의 거센 직선제 요구로보아 7년짜리 체육관 선거를 밀고 가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盧대표도 했다고 봐야지요.무엇보다 후계자 경쟁대열에 올 랐던 盧信永총리나 張世東안기부장은 국회에 진출하지 않았으므로 내각제가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계산을 했을 겁니다.』(Q씨) 내각제가 후계자의 기회를 더많이 보장할수 있다는 판단을 하는데는 처고종사촌인 朴哲彦안기부장특보(現국민당의원)의 조언이 있었다고 한다.
朴특보는 내각제개헌안 초안을 만들어 民正黨 憲特위원장인 蔡汶植의원(前국회의장)에게 넘길 정도로 내 각제에 깊숙이 개입했다.
***朴哲彦씨 草案마련 그러나 盧대표는 내각제가 좋다고 외쳤지만 결코 깊숙이 발을 들이밀지는 않았다.민정당 개헌특위 간사였던 李致浩前의원은『우리 위원회는 청와대와 연결되었을뿐 盧대표로부터 특별한 지침을 받아본 적이 없다.盧대표는 개헌추진과정을챙긴 적이 거의 없다』고 회고했다.
개헌의 별동대격인 憲特의 활동에 간섭이나 지원이 없었던 盧대표는 어떤 면에선 공중에 떠있는 셈이었다.盧대표는 안기부의 朴哲彦 채널로 별도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런 처신이憲特위원들에게는 묘하게 받아들여졌다.86년8월 헌법개정안의 국회제안설명을 야당은 총재가 했지만 민정당은 盧대표 대신 간사인李致浩의원이 맡았다.『내가 憲特간사여서 대신 나갔는데 그점을 누구도 주의깊게 보지않았지요.나는 盧대표가 내각제에 대해 뭔지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음을 알수 있었지요.내각제문제에 대해 盧대표는 주어진 일 이외에는 개입하지 않았습니다.』(李致浩씨) 盧대표가 이렇게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개헌추진은 물론 정국관리를 안기부가 하니까 주도권이 없었던 탓이 우선 컸다.그렇지만 이는 합의개헌 실패에서 오는 책임문제가 두려웠기 때문일 것으로당시 憲特관계자나 일부 청와대출신들은 회고하고 있다.청와대출신T씨의 증언.
『정국관리의 주도권을 張世東안기부장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盧대표의 주도공간은 적었지요.盧대표는 내각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가 실패할 경우 인책문제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고 봐야지요.합의개헌이 불투명해지면서 그 책 임을 야당과張부장에게 넘겨야 했거든요.그로서는 내각제에 전력투구하는 것은여러모로 위험부담이 많았습니다.』 盧대표는 겉으로는 충실한 내각제론자로 비쳐졌지만 이따금 부정적인 시각을 표시하기도 했다.
경북고 후배로 하나회 내부에서 가까웠던 尹泰均民自黨의원(당시 국방정보본부장)의 회고.『사석에서 盧대표는 내각제의 당위성을 강조하면서도 시기적으 로 문제점이 있다고 얘기한 적이 있지요.
』 야당과 재야의 강한 반발로 예상대로 개헌정국은 뒤뚱거렸다.
가을들어 兪成煥신민당의원의 국시발언파동,운동권학생들의 건국대 점거사태와 대량 구속,그리고 이 과정에서의 비상조치선포설로 합의개헌정국은 살얼음을 걷는 형국이었다.兪의원 구속동 의건에 이어 예산문제로 두번째 날치기 통과가 있었던 국회는 충돌의 연속이었다. 86년12월 막판에「先민주화조치 後내각제개헌협상」이란「李敏雨구상」은 한때 합의개헌의 가능성을 점치게 했다.이 무렵에 여권은 양金씨를 배제한 정국운영을 추진했고「공교롭게도」李敏雨구상도 그런 흐름속에서 나왔다.先민주화론은 오랜 교착정 국을타개하는 묘안으로 한때 각광을 받는듯 했지만 양金씨는 거기에 직선제노선에서 이탈하려는 암수가 숨어있다고 보고 뒤틀어버렸다.
李敏雨구상이 퇴색되면서 민정당은 단독으로 개헌발의를 시사했지만엄포에 불과했다.이미 全대통령은 3월초부터 합의개헌 포기와 호헌으로 갔다.권력이양문제에 집착한 全대통령으로서는 개헌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고 4.13조치로 연결시켰다.
***6共때도 과정 再演 퇴임후 영향력 보장이란 측면에서 애착을 가졌던 내각제를 포기하고 서둘러 개헌논의 중지라는 무리수를 쓴 이유는 무엇인가.이는 다름아닌 盧대표의 충성심을 믿었기때문이었다.
『12.12를 같이했는데 퇴임후 이게 문제가 돼도 盧대표가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막아줄 것이라고 믿었지요.거기에다 대통령선거때 확실히 운동을 해주면 퇴임후에도 킹 메이커로서의 功을잊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盧대표에 대해 「믿을수 있겠습니까」라고 주변에서 얘기하면 全대통령은「그런 소리 말라,나는盧泰愚를 친 형제보다 더 믿는 사람이다」고 일축했지요.』(T씨의 이어지는 증언) 張世東안기부장은『4.13을 결정하는데 있어全대통령은 여권내 고위인사들에게 통보했다.그러나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張부장이 말하는 고위인사중에는당연히 盧대표도 포함된다.
『개헌은 권력 승계자가 거부하거나 소극적이면 안되지요.86년내각제 추진 당시 야당의원 일부도 내심 동조하고 있었지요.총대를 메야할 盧대표가 실제 추진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보지 않습니다.물론 직선제의 국민적 지지열기로 내각제는 어 려웠겠지만 全대통령과 盧대표 사이에 내각제와 연관된 후계관리문제에 대한 미묘한 입장 차이로 추진탄력이 떨어졌지요.』 6共들어 盧대통령은5共시절 全대통령이 내놓은 내각제논리를 새롭게 포장해 金泳三대표에게 강요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5共시절 「全과 盧 갈등」의 再版이었다.
〈朴普均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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