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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제도… 우리의 현실(선진교육개혁: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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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정책 갈팡질팡으로 “중병”/과거 통치권자 입김도 문제/2∼3년마다 조변석개 되풀이/8년 산고 수능제도 첫해부터 “삐걱”
중병에 걸린 우리 교육의 환부를 파고들다보면 어김없이 한 곳의 악성 진원지에 도달하게 된다. 다름아닌 대학입시제도다.
교육에 관한 그 어떤 연구나 토론에서도 늘 말썽과 잡음의 시작이자 끝이 대입니다. 대입제도야말로 온갖 비합리와 교육개혁의 최대 걸림돌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주 2차 수학능력시험 성적 폭락사태가 빚어지자 교육당국과 언론사엔 『그러면 그렇지…』라는 한탄과 함께 당국과 정책을 불신하는 비난전화가 빗발쳤다.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2∼3년이 멀다하고 바뀌는 안목없는 정책의 변경,그로인한 교육현장의 난맥을 경험해왔다. 그 과정에서 극명히 뿌리내린 것은 대학이 우리 교육의 종착지라는 비뚤어진 고정관념이다.
뿌리깊은 과거제도가 빚어낸 문화전통,학벌위주 사회 등은 대학이 곧 출세의 첫발이라는 인식을 심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유치원은 국민학교에 가서 배울 것을 미리 가르치고 중·고교는 대입을 향해 공부의 초점을 맞추는,단계별 교육목표 상실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모든 학교교육의 목표가 대학입시가 됐으니 수업도 그 틀과 방향에 꿰맞춰졌다. 이해·사고·응용능력보다 달달 외는 능력이 앞선 가운데 학생들은 수직서열로 대학에 「배치」되는 입시제도에 길들여진 것이다.
이러기를 수십년. 이제야 우리 교육은 달려나가야 할 길이 「인간화」 「국제경쟁력 향상」이란 것을 뒤늦게 절감하지만 굳을대로 굳은 대입 병목현상은 교육의 획기적 개선을 가로막고 있다.
우리의 대입제도가 무원칙·무소신·무안목의 외길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것은 교육정책 당국자의 무능과 최고 결정권자의 무사하지 못한 의사결정 탓도 컸다. 그로인해 교육제도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더욱 증폭된 면이 있다.
예컨대 74년의 고교 무시험제,81∼88년의 졸업정원제,83∼91년의 석사장교제 등을 두고 『당시 최고 통치권자들이 자신들의 자녀를 위해 내린 조치』라는 해석이 지금까지 통설처럼 남아있다.
이것은 진실이든,아니든 우리의 교육제도 개선에 적지않은 해악을 끼쳤다. 『우리의 대학입시는 목표가 없다.』 94학년도 새 대입제도 시행을 앞두고 지난해 교육부가 주최한 공청회에서 학부모들이 던진 공통된 의문에서 그같은 문제제기는 입증된다. 『하고한 날 제도를 바꿔가며 당국이 추구하는 교육의 궁극 목표는 대체 뭐냐』는 질문에 교육부 관계자는 『이번 제도의 목표는 수업 정상화』라고 답했다.
첫째 암기위주 주입식교육 탈피,둘째 대학의 자율선발 기능 부여,셋째 학교교육 정상화가 올해 첫 시행된 수학능력시험과 본고사 부활의 목표이자 취지라는 것이다. 수학능력시험은 새 제도중에선 첫번째 취지를 살리는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독서바람이 국민학교에까지 불고 있고 대화·토론식 수업이 미약하나 시작되고 있다. 영어시간엔 생활회화 공부가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고 실험·실습·견학 등 현장학습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같은 분위기 조성과 함께 능력이 못따라 가는 학교와 교사는 당장 학생들로부터 「무능」 「어용」 소리를 듣고 있다.
그러나 두차례 시험의 난이도 조절 실패라는 운영상의 큰 오점을 남겨 수학능력시험의 데뷔전은 결코 순탄치 않다.
두번째 목표는 공염불로 돌아갔다. 14년만에 부활시킨 국·영·수 위주의 대학별 본고사가 「고액과외 조장」 「대학측의 입시관리능력 한계」 등으로 벽에 부닥쳐 교육부 스스로 『가급적 치르지 말 것』을 권장하는 모순을 범했기 때문이다. 1백38개 대학중 지난 2월말 본고사를 치르겠다던 대학은 41개였으나 결국 9곳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세번째 목표를 위해 고교내신성적을 입시 총점중 40% 이상 반영(종전 30%)토록하고 출결성적과 특활·봉사·행동발달성적을 포함시켰는데 이것은 종전 제도와 차이가 별로 없다.
85년 교육개혁심의회의 건의이후 8년간 연구·실험을 거쳐 탄생한 새 제도는 몇몇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첫해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런 것은 뒤늦게나마 교육당국자가 대학입시를 머지않아 대학에 완전 일임하겠다고 선언한 점이다.
관계자는 그 시기를 『대입정원과 지원생 숫자가 1대 1이 될 무렵인 2000년 전후』라고 전망하고 있다.
◎대입제도 변천사/해방후 정권 바뀔 때마다 대수술 5차례/69년 예비·88년 학력고사 거쳐 수능으로
48년 정부수립이후 한국의 대입제도는 크게 다섯차례 바뀌었다. 그 변화는 대개 정권이 바뀔 때 나름의 「개혁」차원 수술의 성격이 강했다.
50년대와 60년대 초까지의 입시제는 정부가 일절 관여하지 않는 「완전자율」에 가까웠다. 그땐 교육열은 있었지만 너무 가난해 대학에 가려는 수요가 그렇게 많지 않았고 경쟁도 약했다. 대학마다 본고사를 치렀다.
60년대들어 대학진학 욕구가 커지면서 학력이 형편없는 무자격자들의 부정입학이 성행하고 정원과 무관한 소위 「청강생」들이 대량생산되자 65년 박정희정권은 「입학정원제」를 도입했다. 69년엔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고학력 수요가 급증하자 처음으로 정원의 1백50%를 미리 거르는 「예비고사제」가 도입됐다.
11년동안 계속된 이 예비고사제는 80년 국보위의 교육개혁정책에 따라 자격시험이 아닌 선발고사로서의 대입학력고사로 바뀌었다.
학력고사는 전두환씨가 대통령이 된 이후인 82학년도부터 내신성적과 함께 대입전형의 양축이 됐으며,이에 앞서 81학년도부터는 이른바 「망국과외」의 온상이 돼온 본고사가 폐지됐다. 본고사 폐지와 함께 대학들에 「떡」으로 불린 졸업정원제가 실시돼 대학들은 이후 88년까지 정원의 30%를 추가로 받아들여 짭짤한 등록금 수입을 챙겼다.
노태우정권이 출범하던 88학년도부터는 그동안 고교에서 일제히 치렀던 학력고사를 지원대학별로 시행하게 했다. 「선 시험 후 지원」에 따른 눈치작전이 워낙 극심했기 때문.
그러나 대학별로 학력고사를 실시하면서 연초 무더기로 터진 입시부정이 부작용으로 지적됐으며,결국 93학년도를 끝으로 12년간의 학력고사시대도 막을 내렸다.
이번 입시에서 첫 도입된 수능시험은 또다시 「선 시험 후 지원」체제로 회귀한 것이지만 눈치경쟁을 막기 위해 원서접수 때 수능성적표 미제출,계열별 원서접수 등을 대안으로 채택했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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