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버리게 한 「신농정」/심상복 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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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배추를 뽑지 않고 폐기처분하는 농가에 대해 정부가 돈을 준다는 농업시책을 취재하면서 솔직히 「뭐 이런 정책도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기발한 대책을 찾아낸 것처럼 농림수산부측이 『이런 조치는 농정사상 처음있는 일』 『획기적인 대책』이라며 스스로 대견스러워하고 있는 모습에서 특히 그렇다.
이것도 신농정의 「신」에 포함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먹는 음식을 버리는 일은 예부터 금기시 돼왔다. 물론 먹을 것이 부족하던 때의 일이긴 하지만 식량이 남아도는 요즘도 아껴 먹는 습관은 여전한 미덕이다.
정부 당국자는 배추값 폭락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이 지경에까지 오도록 정책당국은 뭘 했으며 과연 이런 조치의 다른 방도는 없는지 따져 볼 일이다.
농림수산부측은 지난 7월 전국 3천여가구의 표본농가를 대상으로 배추재배의 의향조사 결과 올 배추재배가 20% 정도 늘어날 것으로 나타나 재배면적을 줄이도록 홍보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가들이 이 충고를 듣지 않아 이런 결과를 빚었다며 책임을 농민들에게 돌렸다.
그러나 이같은 사태는 이미 몇년전부터 예견됐던 일이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 타결되면 경쟁력을 잃어버린다며 포도를 비롯한 여러 작목을 취급하지 못하도록 했고,그 결과 너도나도 배추에 매달려 재배지역이 대관령 등 일부지역으로부터 전북 등 남쪽지방에까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게다가 공급과잉에 대한 정부의 홍보가 농민들에게 얼마나 제대로 전달됐는지 의문이 남으며,홍보내용이 배추 재배면적을 줄이라는 정도지 배추 대신 무슨 작물을 심는 것이 좋겠다는 식의 대안을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올 재배면적이 지난해보다 약 50%나 늘어났는데 작년엔 그 50%에 무엇을 심었느냐는 질문에도 농림수산부 관계자는 『잘 모르겠다』고 답변하고 있다.
농림수산부는 또 전체적인 수요가 정해져 있어 배추를 버리지 않고 누군가 먹으면 배추값 폭락을 막을 길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애써 경작한 배추를 정부가 돈까지 주며 버리도록 유도하는 정책은 아무래도 국민정서에 맞지 않는다.
농림수산부는 농업개방 문제에서부터 배추를 썩여 버리는 일까지 국가경제적으로 어느 것이 더 이득인지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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